<사진> 유엔 북한 대표부 앞에서 북한의 핵도발을 규탄하는 마영애씨.
베이징이나 모스크바에서 느꼈던 ‘공기’는 평양과 달라
“나는 해외 출장을 자주 다녔습니다. 중국 뿐 아니라 러시아 출장도 자주 갔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러시아는 그 당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서방세계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곳에 한번 두 번 다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아, 이곳은 참 자유롭구나, 대체 이 자유가 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디다. 그럴 때 마다 얼른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고 평양으로 향하곤 했지요.”
그녀의 말이, 북한 외교관들이나 해외에 자주 나가는 공작원들의 말로가 결코 좋지만은 않단다.
북한 정부는 그들이 본국으로 복귀했을 때 이미 서방세계가 주는 자유에 길들여 진것으로 간주하고 갖은 트집을 잡아 정치범 수용소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단다.
해외 출장이 다른 공작원들에 비해 월등히 잦았던 마영애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백성룡 사건이라고 아시는 분들은 알겁니다. 90년대 중반 조선족 사업가 백성룡 씨가 북한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다가 떼인 사건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북한과 은성무역합영회사를 운영했는데 북한 당국이 백 씨의 투자금을 모두 착복하고는 ‘나 몰라라’ 한겁니다. 그 돈을 떼어먹은 보위부가 나를 백성룡 씨의 주요 활동지역인 중국 목단강시(市)로 보내서 그가 한국 국정원의 자금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게 한겁니다.”
그러나 그녀가 현지에 가서 조사해 보니 백 씨는 아무 문제 없이 8개의 회사를 운영하는 대규모 사업가인데다가 국정원의 도움은커녕 국정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조사한대로 있는 그대로를 보고 하니 그때 부터 마씨에 대한 북한 당국의 탄압이 시작됐다.
해외 물을 꾸준히 마신 자신을 숙청하기 위한 북한 당국의 계략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
순대처럼 구불구불 평양에서 뉴욕까지 구곡양장의 고난을 딛고서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기 까지의 여정도 만만치 않았단다. 그러나 이 부분은 아직도 연관된 사람이 많고 민감한 부분이라 그런지 그녀가 자세히 언급 하지 않았고 기자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미국에 정착하게 된 사연도 마찬가지이다. 2004년 그녀는 미국 의회에 북한의 인권상황을 증언하기 위해 서울서 만나 재혼한 탈북민 출신 남편과 함께 미국에 왔다. 2004년 북한과의 관계를 신경 많이 쓰던 한국의 진보 정권 시절로 북한의 인권 상황을 규탄하는 미 의회 보수계들의 청문회에 참석차 떠나는 그녀를 한국 정뷰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극렬 만류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북에 대해 심한 말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 가지 쓰고 오게 됐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질리 없었고 그녀는 동행한 정부요원과 대판 싸운 끝에 여권을 집어던지고 미국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역시 민감한 사안으로 후일 기회가 닿으면 제대로 밝히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되고 나니 하릴 없는 무국적자에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내 여권이 말소되 신분을 증명 할 수 없으니 미국 내에서 무슨 수속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 나를 초청했던 공화당 의원들도 너무나 안타가워했죠. ”
그 뒤로 그녀는 뉴욕 플러싱에서 시작해 버지니아 LA등 미 전역을 남편과 함께 떠돌며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그래도 그 사이에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만나 신학교를 다녔던 것이 인생의 나침반이 됐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던 사이 한국엔 보수 정권이 들어서 마침내 그녀의 신분 문제가 해결이 됐다. 이명박 정부 때는 직권으로 대한민국 여권을 재발급 받았고 박근혜 정권땐 미국 내에서의 신분 문제가 완전 해결 됐단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해외 탈북민 출신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로 거론 될 정도로 국내외 이름을 각인시켰다. 매일 같이 유엔 북한 대표부 앞에서 1인 시위하며 최고 존엄을 타도하라고 외쳤던 ‘독종, 마영애’.
그녀가 순대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LA에서부터 시작해 연원이 있다. 처음부터 호평을 받아 비즈니스가 잘됐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정통 평양식으로 멥쌀과 찹쌀을 넣어 순대를 만들었는데 맛은 있다면서도 사람들이 사먹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동부 쪽으로 다시 와 사업을 확장하면서 서울식으로 당면을 넣어봤더니 이게 먹힌겁네다.”
그렇다고해서 무조건 당면만 넣었다고 호평 받은 건 아니다. 그녀가 웃으면서 말해주지 않은 네 가지 비밀 레시피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뉴욕 뉴저지에서 그녀의 순대를 안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전설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 하나, 그녀의 사업 번창의 비밀.
“우리 마 사장님 같은 사람 또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 30년 살면서 식당일 등 안해 본 일 없는데 이런 사장님 못봤어요.”
한남 마트 순대 매장에서 수 년째 일하고 있는 한 이모의 증언이다.
“우리 사장님이요, 단 한번도 급여 날짜 어긴 적 없고 월급만 딸랑 준적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순대집에서는 파는 것 보다 사장님이 누구 오면 전화해서 순대 좀 넉넉히 썰어주라고 한게 더 많습니다.”
퍼주면 퍼줄수록 하나님이 더 주신다는 마 사장의 얘기는 우리는 실천을 못할 뿐 다 아는 이야기 아닌가.
특히 탈북민들이야 우리가 상상도 못한 고생을 했겠지만 그중에서도 미국 까지 와서도 계속된 그녀의 고생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누구보다도 크다. 특히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에 대해선 인종도 국적도 정치성향도 불문인 것이 그녀의 철칙이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곤 한다. 특히 같은 탈북민들이나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그럴 때면 더 서운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다 같이 돕고 살아야죠’ 하며 활짝 웃는다.
손도 큰 그녀는 이제는 탈북민들을 돕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미국 내 우리 동포뿐만 아니라 타민족 가운데서도 생활이 어려운 가정의 학생들이 마음 놓고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장학재단 설립을 준비 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던 무국적자, 불법체류자였던 내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엄지척 하는 ‘노스코리안 영애마, 넘버원 비즈니스 우먼’이 되기까지는 미국이 아니었다면 불가능 했을 겁니다. 이제는 내가 미국으로 받은 은혜를 사회에 환원할 때입니다.”
흑룡강에서 단천, 단천에서 평양 그리고 평양에서 도문, 도문에서 서울 그리고 서울에서 뉴욕까지 그녀가 걸어 온 구곡양장의 그 구불구불하고 멀고 험난했던 길이 그녀가 파는 순대처럼 따끈따끈 하고 호평 받는 길이 되었으면 하는 진한 바람을 가지면서 기자는 그녀와의 인터뷰를 마쳤다.
그런데 어디선가 맛난 순대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한남체인 제과점에서 안지영 쓰다.
뉴욕 안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