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역사의 연자맷돌을 돌리고 계시는 하나님
함석헌 옹은 그의 역사철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저서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체를 절대의 세계에서는 신 곧 하나님, 그리고 상대의 세계에서는 씨(씨알) 곧 민중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즉 드러난 차원에서는 민중이 주인공이요, 숨은 차원에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드러난 차원의 역사와 숨은 차원의 역사가 맞물리면서 나타나며, 따라서 절대의 세계와 상대의 세계의 팽팽한 긴장을 알아야만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견 일리가 있고 설득력이 있는 역사관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그의 역사관은 절대자이신 하나님보다는 씨 즉 민중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인상을 짙게 풍기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가 절대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점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는 역사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trinity)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교부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심판은 큰 연자맷돌과 같다. 이 연자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가기 때문에 소리가 없지만 모든 것을 매우 보드랍게 간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동시대에 살았던 교부 오리겐도 터툴린안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의 연자맷돌은 너무나 천천히 돌기 때문에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우리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마치 지구가 공전하고 자전하는 소리가 우리의 가청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듣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도 너무나 거대해서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영향력 있는 기독교 역사학자인 찰스 비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는 많은 시간을 들여 역사를 연구한 끝에 네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장에는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종당에는 매우 용의주도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근시안적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 같아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궁극에는 하나님의 장중에서 모든 불의와 죄악은 심판을 당해 파해지고 정의와 진리는 승리하여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적 역사관을 함축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에 대해 매우 풍자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8:11) “악한 일에 관해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하나님은 인간이 악을 행할 때 즉시 벼락을 내려치거나 시쳇말로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시지 않고 모르는 체 묵묵히 관망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 간땡이가 부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담대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죄를 간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로 잠시 징계를 보류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전적으로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37편에서 다윗은 악한 자들이 형통한 것을 보면서 심적인 갈등을 느끼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며 하나님의 심판을 지켜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시편 73편에서 아삽도 다윗이 언급한 것과 동일한 심적 갈등을 토로하며 성소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해답을 얻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37:7-10)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도다.”
올해로 우리는 8.15 광복절 77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광복절이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유월절이 있습니다. 유월절과 광복절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 당시 열강 중의 열강이었던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던 유대인들, 그리고 막강한 서양의 열강들과 맞서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군사력을 지녔던 일본 제국, 이들로부터 자체의 힘으로 해방과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심으로써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민을 위한 구속사(救贖史)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족속을 위한 일반 세속사(世俗史)까지도 주관하시는 명실공히 유일한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역사의 맷돌을 돌리고 계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직도 더 곱게 빻으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시기에 우리 인간 편에서는 응답이 지체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확신해야 할 것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in His time) 하나님의 방법으로(in His way) 역사하신다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어쨌든 그가 절대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점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는 역사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trinity)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교부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심판은 큰 연자맷돌과 같다. 이 연자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가기 때문에 소리가 없지만 모든 것을 매우 보드랍게 간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동시대에 살았던 교부 오리겐도 터툴린안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의 연자맷돌은 너무나 천천히 돌기 때문에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우리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마치 지구가 공전하고 자전하는 소리가 우리의 가청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듣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도 너무나 거대해서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영향력 있는 기독교 역사학자인 찰스 비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는 많은 시간을 들여 역사를 연구한 끝에 네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장에는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종당에는 매우 용의주도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근시안적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 같아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궁극에는 하나님의 장중에서 모든 불의와 죄악은 심판을 당해 파해지고 정의와 진리는 승리하여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적 역사관을 함축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에 대해 매우 풍자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8:11) “악한 일에 관해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하나님은 인간이 악을 행할 때 즉시 벼락을 내려치거나 시쳇말로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시지 않고 모르는 체 묵묵히 관망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 간땡이가 부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담대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죄를 간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로 잠시 징계를 보류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전적으로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37편에서 다윗은 악한 자들이 형통한 것을 보면서 심적인 갈등을 느끼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며 하나님의 심판을 지켜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시편 73편에서 아삽도 다윗이 언급한 것과 동일한 심적 갈등을 토로하며 성소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해답을 얻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37:7-10)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도다.”
올해로 우리는 8.15 광복절 77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광복절이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유월절이 있습니다. 유월절과 광복절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 당시 열강 중의 열강이었던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던 유대인들, 그리고 막강한 서양의 열강들과 맞서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군사력을 지녔던 일본 제국, 이들로부터 자체의 힘으로 해방과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심으로써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민을 위한 구속사(救贖史)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족속을 위한 일반 세속사(世俗史)까지도 주관하시는 명실공히 유일한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역사의 맷돌을 돌리고 계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직도 더 곱게 빻으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시기에 우리 인간 편에서는 응답이 지체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확신해야 할 것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in His time) 하나님의 방법으로(in His way) 역사하신다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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