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극복해야 할 세 가지 궁극적인 과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바로 죄와 죽음과 허무입니다. 오늘은 이 세 가지 중에서 허무를 극복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전도서를 열면 첫머리에 ‘헛되다!’라는 단어가 수차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도서 1:2-14)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한 마디로 인생은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솔로몬은 당대에 그 누구보다도 많은 부귀영화를 누린 자였습니다. 그가 누린 영광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들의 백합화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과 비교하셨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누린 영화를 자신의 입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좀 길지만, 그가 누린 영화를 알 수 있도록 한번 인용해보겠습니다.
(전도서 2:3-11) “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그의 이러한 고백은 영화와 부요와 풍요로움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마지막 고백은 대반전을 보여줍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그는 자신이 누린 모든 부구영화도 결국은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된 것이었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아비지 다윗의 후광을 업고 당당한 권세를 누렸습니다. 시바 여왕을 비롯해 주변의 여러 나라 왕들이 앞다투어 조공을 바치며 이스라엘과 선린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쓸 만큼 국력도 대단했습니다.
(열왕기상 10:21-27) “솔로몬 왕의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정금이라. 은 기물이 없으니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함은 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고 그 다시스 배로 삼 년에 일차씩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을 실어왔음이더라.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 천하가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 얼굴을 보기 원하여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정한 수가 있었더라.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뿐만 아리라 솔로몬 하면 지혜라는 단어를 연상할 정도로 그는 전무후무한 지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마자 정말 까다로운 재판을 지혜롭게 판결함으로써 ‘솔로몬의 재판’이라는 유명한 말까지 생기게 되지 않았습니까. 또한 그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기도 했습니다.
(열왕기상 4:29-34)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그는 식물, 동물, 곤충, 어류, 조류 등등 어떤 분야에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Ph.D 박사학위를 여러 개 받았을 만큼 다방면에 출중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또한 세상의 온갖 쾌락을 다 누렸던 자였습니다. 그는 많은 처첩을 거느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왕비로 맞이한 자가 700명이요 첩으로 거느린 자가 300명이었습니다. 3천 궁녀를 거느린 백제의 의자왕에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1천 명의 여자를 거느렸으니 대단한 숫자입니다. 또 ‘노래하는 남녀’를 두었다고 했으니 요즘으로 말하자면 기쁨조라고나 할까요.
이토록 엄청난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솔로몬이 인생만년에 고백한 것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인생이 이렇게 허망하고 허무하기만 한 것일까요?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값진 선물인데, 이렇게 허망하고 허무하기만 하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 쓸모도 없는 허접쓰레기 같은 인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시인 Longfellow의 ‘인생찬가’(A Psalm of Life)라는 시는 저가 참 좋아하는 시인데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Life is but an empty dream.”
Life is real! Life is earnest!
And grave is not its goal.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슬픈 곡조로 내게 말하지 말아요.
인생은 참된 것! 인생은 진지한 것!
무덤은 인생의 목적지가 아니라오.)
인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인생의 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김상용 시인의 시의 구절이 기억나시죠?
남으로 창을 내겠소 / 밭이 한 참 갈이 /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 왜 사냐건 웃지요.
세상 명리(名利)의 유혹을 뿌리치고 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나에게 누가 ‘왜 이러고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빙그레 미소지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시입니다. 이 시인은 자기 나름대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주알고주알 다 읊어댈 수는 없지만 자기 나름으로는 분명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우리는 방황하게 되고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이라는 오스트리아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 2차 대전시 독일의 나찌 치하에서 단순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해 네 군데의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말할 수 없는 박해와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동료들을 도와주며 희망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그 마음가짐은 우리가 삶의 의미를 발견했느냐 발견하지 못했느냐의 차이에 달려있다.” 그는 수용소에서 풀려나온 후에 의미요법(Logotherapy)라는 심리요법을 창안했습니다. 그리고 수용소에서의 경험과 그의 의미요법의 이론을 정리해서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전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을 때 우리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서도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했던 솔로몬은 전도서 맨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만 인생의 참 의미를 찾고 허무를 극복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전도사를 기록한 목적입니다.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아멘!
서울장로교회 김재동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