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on: Oct 11, 2019
상식이 위험하다. ‘조국 사태’로 ‘상식과 비상식’의 전선이 형성됐다.
서양의 논리학은 상식보다 궤변(詭辯)이 횡행하던 시대정신에 저항한 철학자들의 지적 봉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위 궤변론자였던 소피스트들은 시장의 상거래에서, 법정의 변론에서, 정치적 연설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술수를 가르친다.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으로부터 공감과 설득을 이끌어내기 위해 웅변술과 수사학을 개발해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한다. 자기 스스로가 ‘만물의 척도’이며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강변한다.
일반적으로 개를 양이라 하고 양을 개라고 하는 주장을 궤변이라고 한다. 우리는 콩을 팥이라 하고 팥을 콩이라 하는 억지 주장을 경계한다. 이때 사용되는 언어는 거짓을 진실로 위장하는 악의 도구일 뿐이다.
이것을 이용해 선전과 선동을 일삼는 집단이 있는 한 그 사회는 내부로부터 파괴된다. 나치의 선동가였던 요제프 괴벨스의 망언들을 살펴보자.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이런 유사한 주장들을 하는, 소위 ‘파워 엘리트’로 자처하면서 진영 논리를 유포하는 지식인들이 준동하고 있다.
일찍이 서양 논리학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저러한 궤변에 맞서 말했다.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다. 반면에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참과 거짓의 판단은 이렇게 간단명료하다. 그것은 추상적이거나 분석적인 성찰이 아니고 오히려 단순하고 자명한, 건전한 상식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에서 어린아이는 임금님이 옷을 입지 않은 사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반면에 어른들은 자기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참된 현실을 부정한다. 그들은 명백한 현실을 고의적으로 외면하고서 거짓을 진실로 위장한다.
혹자는 ‘증거 인멸’을 ‘증거 보전’으로 바꿔 말한다. 피의자를 정의를 위한 ‘개혁의 아이콘’으로 간주한다.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하는 검찰에게 돌연 ‘물러나라’라고 외치고 피의자를 박해받는 자로 간주하면서 ‘수호하라’라고 외친다.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전도(顚倒)하는 이런 광기에 사로잡힌 진영 논리가 국민의 건전한 상식과 도덕성을 파괴한다. 피의자를 피해자로 간주하면서 영혼 없는 대중의 선동과 분열을 조장하는 술책이 정치를 삼키고 있다.
그들의 궤변은 법치주의와 일반 시민들의 양식과 도덕성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고 배반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윤리적인 패닉’을 유발해 상식적인 국민을 분노하게 한다. “책략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한 장본인이 자신은 정녕 책략이 진실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위선적 지식인들에 의해 시민적 공적 윤리와 공준(公準)이 붕괴하고 있다. 피의자가 개혁 적임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모름지기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불변적인 상식을 수호해야만 한다.
강학순 안양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