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on: Nov 2, 2019 11월 첫째 주일 말씀
지난 10월 31일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502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동기는 그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여러 가지 비성경적 관행들 중에서도 면죄부 판매가 가장 큰 동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면죄부란 쉽게 말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딱지(certificate)입니다.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면증서가 바로 면죄부입니다. 면죄부 구입의 액수에 따라 죄사함의 정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저는 유럽의 성당에는 직접 가보지 못했지만, 단기선교차 과테말라에 여러 번 간 경험이 있는데, 그 나라의 관광코스이기도 한 어느 유명한 성당에서 면죄부의 가격이 다르게 매겨져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면죄부 발행의 신학적 기초를 제공한 사람은 『신학대전』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통해 가톨릭 신학의 기초를 세운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그는 고해성사와 사제의 사면교리를 결부시켜 면죄부 판매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고해성사에는 통회, 고백, 보상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죄는 통회하고 자복함으로써 사함을 받지만, 그러나 그 죄의 형벌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반드시 기도, 금식, 구제, 성지순례와 같은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3세기에 형성된 ‘교회의 보화’ 라는 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잉여(剩餘) 공로들이 하늘에 보화로 쌓여 있기 때문에 교황은 죄인이 면죄부를 살 때 면죄부 값에 상응하는 사죄의 도움을 그 보물창고로부터 가져와서 죄인에게 베풀어 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쉽게 말해, 다른 사람들이 쓰고 남은 공로를 나의 죄사함을 위해 돈으로 사다가 사용할 수 있다는 교리입니다.
루터는 면죄부가 성경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어긋난다는 생각에 이 문제를 공론화했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한 마디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표현이 다소 거칠긴 하지만 ‘때 빼고 광(光)내는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무지 때문에 생겨난 잘못된 관행으로 인해 하나님 말씀 위에 겹겹이 덕지덕지 묻은 진때를 벗겨내고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어 번쩍번쩍 광이 나게 하자는 것이 종교개혁의 근본취지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성경이 말씀하게 하자!”(Let the Bible speak.)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신앙의 모토 중의 하나가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추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게 하자!”(Let God be God.)는 것 또한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미국에서 시작해 지금은 여러 나라에서 지키는 핼러윈 데이(Halloween Day)는 로마 가톨릭의 성자숭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종교개혁일과 겹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1년 365일에 성인들을 지정해서 숭배하는 전통이 있는데, 성인의 수가 365명을 훌쩍 넘어서자 미처 날짜에 지정되지 못한 성인들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나머지 모든 성인들을 함께 기념하는 날을 정하게 되었는데, 그 날이 바로 ‘모든 성인들의 날’(Day of All Saints) 즉 만성절(萬聖節)입니다.
그런데 이 만성절이 영국의 켈트족들의 민간신앙에 접목되면서 핼러윈이라는 날이 탄생하게 되었고, 미국에 온 영국 이민자들 가운데 주로 아이리쉬(Irish) 계통의 이민자들에 의해 이것이 미국의 명절로 정착된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중세시대의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성인숭배와 성상숭배가 성행했고 기도할 때도 성인들의 중보를 통해 기도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아기들의 이름도 태어난 날의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게 관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사역을 해주실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의 중보사역에는 기도의 중보사역보다 더 중요한 사역이 있는데, 바로 구원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소위 타종교와의 대화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종교다원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도 구원받는 길이 많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One God, many Christs’를 표방합니다. 몇 년 전에 서울 성공회 신학교의 비교종교학 교수인 오강남 교수가 『예수는 없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출간해서 기독교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정통 기독교에서 외경(外經)으로 취급하고 있는 도마복음을 중심으로 『또 다른 예수』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노골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면서 불교 용어까지 동원해 예수님을 ‘성불한 예수’라고 일컫는 망발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종교는 다 동일한 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회교도이면서 동시에 기도교인이 될 수 있고, 불제자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원주의란 쉽게 말해서 이것저것 다 인정하고 포용하자는 주장입니다. 그는 기독교의 배타성을 ‘만만주의’라고 비꼬고 있습니다. ‘기독교만, 예수만’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죠. 그는 우리의 신앙은 ‘도도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괜찮다’는 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견 그의 주장이 통 큰 포용주의처럼 들려질 질 수도 있으나 사실상 복음주의에서 한참 멀리 벗어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데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소 융통성 있게 적용될 수 있겠지만, 성경의 근본적인 진리, 특히 구원의 도는 결코 변개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을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절대성을 지닌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복음의 절대성이 희석되거나 왜곡된 사례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하던 시절에 이미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일례로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을 왜곡하고 물타기를 함으로써 사도 바울의 신랄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는 진리를 희석하거나 왜곡하는 자는 그 누구든 저주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1장).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다섯 가지 오직(Five Solas)’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1.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2. Sola Gratia (오직 은혜)
3. Sola Fide (오직 믿음)
4.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5.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hiuskorea.com <기쁜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