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가을의 강물은 유장하게 흘러간다. 높푸른 하늘의 구름은 한없이 자유롭다. ‘그때, 거기’에서 젊은 날의 하늘에는 온통 저항의 깃발이 펄럭였다. 그 깃발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지적 목마름과 봉기였다.
기성 체제로부터 오는 모순과 억압에 대한 성찰과 저항은 지성인의 특권이다. 그것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이념적 환상의 길과 책임져야 할 현실의 길 사이의 갈림길에서 느끼는 근본주의적 확신과 분노로 구체화한다.
청년기에는 대개 현실 세계보다 가능 세계를 지향하고 선호한다. 그러나 그 가능 세계가 현실 세계보다 더 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환상적 미래는 모순적 현실보다 더 가혹한 디스토피아일 수 있다. 이는 대가를 지불한 세월의 경험과 한국의 현대사가 분명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결코 추상적 미래를 위해 구체적 현실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이른바 ‘586세대’가 젊은 날에 갈망했던 ‘인간적이고 도덕적 사회주의 건설’의 이념적 환상과 명분은 1990년대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으로 신기루임이 드러났다.
소위 추상적 ‘지고지선의 가치’를 무작정 희망했던 이념의 세계가 환상임이 밝혀졌기에 이제는 엄혹한 현실의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세월이 가면 시대를 읽는 문법도 탄력적으로 변하고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이념적 환상이 구체적이고 ‘역사적 현실’과 ‘현실적 인간’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바탕에 두지 않을 때 지극히 공소(空疏)하고 위험하다. 환상이란 경험적 현실을 도외시한 자유로운 유희적 정신작용이기 때문이다.
현실적 인간은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말하자면 조건에 따라 도덕적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모름지기 인간은 확정되지 않은 열려진 자유로운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념에서는 인간의 실현불가능한 도덕성을 자명한 전제로 삼음으로써 결정적 오류를 범한다. 가상적 도덕성을 절대시하고 그것에 기초해 진리 독점권을 계속 주장한다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까. 근대적ㆍ시민적 자유의 가치와 책임의식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동시에 개인의 비판적 사유와 자유로운 사회적 상상력도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공교육 현장에서는 집단적 평등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반면 개인 자유의 가치는 등한시되거나 실종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우리는 ‘자유 없는 평등’과 ‘평등 없는 자유’를 경계한다. 어느 시대든 좌파적 전체주의나 우파적 파시즘은 위험하다. 오로지 자유의 가치가 전제된 평등의 가치만이 존중 받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집단주의의 사고인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헌법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영논리는 팩트와 진실 위에 군림하고, 환상으로 현실을 덮으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환상과 현실의 전복(顚覆)이 일어난다. 환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환상이 된다. 더욱이 비상식과 광기가 상식과 이성을 대체한다. 따라서 환상의 이념보다는 현실의 과학이 필요하다.
‘지금, 여기에서’ 추상적인 선과 평등을 향한 사회주의의 이념적 환상인 ‘자유 없는 민주주의’로 방향을 설정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오류요 패착이다.
교육자들은 미래 세대에 환상적 이념을 주입시키는 대신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과 엄혹한 역사적ㆍ사회적 현실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과학을 가르쳐야 한다.
강학순 안양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