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성경 전체에서 주인공은 단연 예수님입니다.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바라보는 예수’(prospective Jesus)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물론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주로 예언의 성취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회고하는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돌아보는 예수’(retrospective Jesus)라고 말합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의 역사이기 때문에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님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도처에 숨은 그림처럼 계시되어 있으며, 그 조각그림 하나하나를 맞추어보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퍼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실체가 그림자로 예표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자를 표상(表象) 또는 모형(模型)이라고 합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건물의 모형과 실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모형은 장차 완성될 건물을 어렴풋이 보여주지만 건물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 건물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형을 볼 때 장차 지어질 건물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연관시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가리켜 ‘모형론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이라고 하며, 이러한 해석 원리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로마서 5:14)이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대표성의 원리’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죄인의 대표인 반면 예수님은 의인의 대표입니다(로마서 5:18).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22).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생령)이 되었듯이 마지막 아담 즉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45).
이 해석 원리를 따르면 구약성경의 여러 사건, 제도, 인물, 그리고 사물에 대하여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각 한 가지씩 예만 소개를 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사건과 관련해서는 놋뱀 사건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민수기 21:4-9).
(요한복음 3:14-16)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험한 길로 인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자 하나님은 사막의 불뱀 즉 독사들을 불러 모아 이스라엘 백성을 사정없이 물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다급해진 그들은 모세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놋으로 불뱀 형상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고 하시면서 그 장대를 쳐다보는 자마다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말씀대로 뱀을 쳐다본 자들은 신통하게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이 그저 광야생활 중 우연히 일어난 하나의 해프닝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 연출된 사건이라고 친히 해석해 주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음은 제도와 관련해 도피성(refugee city) 제도를 좋은 예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20:6)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비록 사람을 죽인 자가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오살자(誤殺者)로 판명이 나서 법의 보호를 받더라도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도피성에서 나오면 ‘피의 복수자’가 그를 죽인다 해도 그것은 법이 보장하는 정당한 복수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완전히 죄가 면죄된 신분으로 방면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면죄와 대제사장의 죽음을 연관시킨 것은 이 도피성제도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자의 사역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이 그 사람의 피값을 대신 갚아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죽음과 동시에 자동사면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일반세상 관례와는 달리 속전(ransom) 즉 몸값을 받고 죄를 사면하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결코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사해질 수 없다는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물과 관련해 만나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3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필요에 의해 내려주신 기적의 식품이었지만 예수님은 이 만나가 생명의 식품이 되는 당신 자신을 예표하는 것으로 친히 해석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물과 관련해 이삭과 요셉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삭은 죽은 자나 다름없었던 자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을 예시하고, 요셉은 적어도 성경에 기록에 의하면 흠 없는 삶을 살았던 자로서 무흠하신 예수님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이상 열거한 것 외에도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에 관한 내용들이 수없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숨은 그림들을 찾아내는 것이 성경해석의 과제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1,600여 년에 걸쳐 다양한 배경을 가진 40명 이상의 저자들이 기록했지만 정말 놀라울 정도로 통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의 드라마의 각본을 쓰시고 직접 연출까지 하셨으며, 영원토록 변함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구원의 드라마의 무대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인공으로 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전혀 무관해 보이는 책이지만 한 편의 드라마의 전편과 후편처럼 서로 아귀가 맞고 일관성과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사건과 제도와 인물과 사물은 이를테면 소설의 복선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복선을 깔아놓지 않고 그저 우연한 인연을 내세우는 소설은 이른바 삼류소설로 치부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철저하게 복선을 설정해놓은, 탄탄한 내용과 구성을 지닌 정말로 탁월한 역작입니다. 그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그 분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마지막이십니다.
<김재동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