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경자년(庚子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금년은 쥐띠 중에서도 흰쥐띠 해라고 합니다. 흰쥐는 번영과 평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것들을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희망 속에 한 해를 시작한다는 것은 그리 나쁠 것은 없다고 봅니다. 특히 사람들은 새로운 십년,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이 시작될 때 막연하나마 무엇인가 상서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곤 합니다. 이것을 ‘어림효과’라고 한다는 말도 들어본 기억이 납니다. 올해는 새로운 10년(decade)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해서 이 ‘어림효과’를 기대하는 자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제보다는 오늘이, 작년보다는 올해가 더 나아질 것이란 기대 속에 살아갑니다. 한국에서 한 취업 포털업체가 성인 3,143명을 대상으로 2020년 새해에 희망하는 한자(漢字)를 하나 뽑으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나아갈 진(進)’ 자를 뽑았다고 합니다. 인간이 갈망하는 것은 진보입니다. 인간은 진보를 향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갓난쟁이가 아장아장 걷게 되고, 말하지 못하던 아이가 한두 마디 말을 하게 되고, 사물을 잘 분별하지 못하던 아이가 사물을 분별하여 지혜롭게 대처하게 되는 것은 모두 조금씩 진보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진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신앙적으로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13을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대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성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숙한 인격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목표는 그렇게 설정해 놓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5:12 말씀을 보면, 신앙적으로 제자리걸음하는 성도들을 향한 질책과 책망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젖을 먹는 어린아이가 장성하여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어야 하거늘 아직까지 젖이나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자라지 않고 늘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미성숙한 성도들을 향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있습니다. 사실 신앙에는 제자리걸음이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상유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뒤로 물러서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진보냐 퇴보냐 둘 중의 하나이지 정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육에서는 죽음조차도 배움의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교육에는 ‘이만하면 됐지!’라는 한계는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노망이란 허용되지 않습니다. 한때 톰 죤스가 불러 유행했던 노래의 제목처럼 ‘Keep on running’ 즉 ‘중단 없는 전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전진하는 신앙인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자신의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실 사도 바울만큼 열심히 신앙의 경주를 한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이만 하면 됐지!”라는 안일한 생각 대신 ‘위에서 부르신 부름(High Calling)’ 즉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아직도 달려갈 길이 남아있어!”라는 결연한 자세로 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칼 힐티는 『행복론』에서 “인간은 자기의 사명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는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음과 동시에 죽는 그 순간까지 그 사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자세를 끝까지 견지함으로써 신앙의 마라톤에서 완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앞으로 달려가겠다.”는 다짐입니다. 바울은 아픈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자였고, 예수 믿는 자들을 극악하게 핍박하는 일에 선봉장 역할을 했던 자였습니다. 이러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늘 죄책감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마냥 일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과거에 발목이 잡혀 허우적거리기보다는 지난날의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 더 열심히 분발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지난날의 상처와 과오 때문에 현재와 미래에 손해를 보는 미련함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과거의 수치스러운 상처를 영광스러운 현재와 미래로 승화시키는, 즉 상처(scar)를 별(star)로 바꾸는 신앙적인 지혜를 발휘한 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좋든 나쁘든 과거에 발목이 잡혀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합니다. 지난 과거에 발목이 잡혀 소모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Longfellow)는 ‘인생찬가’(A Psalm of Life)에서 ‘과거는 과거로 돌려버리라’(Let the past be the past!)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난날을 추억하며 불평불만을 일삼던 나쁜 습관을 본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난날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 현재 매순간 경험하고 있는 만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은혜, 그리고 장차 가나안 땅에서 베부실 풍성한 은혜를 망각한 채 과거의 알량한 음식물에 집착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약속의 땅을 향한 전진을 중단하고, 급기야 광야에서 죽는 비극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배운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도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끊임없이 개발해간다는 ‘전진과 발전’의 의미에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즉 과거를 반추하되 거기에 머물지 말고 현재와 미래의 생산적인 삶에 그것들을 지혜롭게 활용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리빙스톤(Livingstone)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여러 해 동안 수고하고 잠시 영국으로 귀국했을 때, 누군가가 “박사님, 이제 다음에는 어디로 가실 겁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앞으로 나아가는 곳이면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리빙스톤 박사는 이미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과거의 업적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새해를 맞아 과거의 업적에 연연하지 말고 쥐처럼 근면하게 살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진일보(進一步)하는 한 해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