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 1학년 이후 나의 개인적 연례행사는 국군의 날 행사를 매년 거의 빼놓지 않고 챙겨보기였다. 나를 여성으로서 군문을 꿈꾸게 했던 것도 81년도 국군의 날 행사였다. 그때 막 나온 칼라티비 속, 소총을 어깨에 걸고 무릎까지 오는 흰 부츠에 흰 스커트 예복을 입고 아름다운 위용을 한껏 뽐내며 힘차게 행진하는 여군들의 모습이었다.
그 날 이후 나의 꿈은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였다.
학교에서 장래 희망에 관한 글이나 그림을 그려오라 하면 나는 국군의 날 행사 퍼레이드에서 보았던 여군들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짓곤 했다.
아이들의 꿈은 수시로 바뀌기 마련이고 더구나 나 같은 변덕쟁이 어린이는 꿈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었는데 ‘그 날’ 이후 15년을 한결 같은 꿈을 꾸었고 결국엔 그 꿈을 이루어 3년간 전방 철책 사단에서 대북방송 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는 것이 지금 돌아보아도 나 자신에게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입을 벌린 채 황홀하게 바라 보았던 그 퍼레이드는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육군 본부 및 각 군사령부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여군들이 행사 석 달 전부터 모여 한여름 땡볕 아래 흘린 땀의 결실이라는 걸 군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나의 동기들 대부분은 그 행사 연습에 동원되었고 나는 전방 사단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행사소집에서 제외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군문을 나온 이후에도 매년 국군의 날 행사를 볼 때 마다 벅차오르는 감동은 일반 여성들과는 남달랐다.
오늘 새벽, 한국과의 아이들 영어책 리딩 줌 수업을 마치고 찾아 보게된 73주년 국군의 날 행사 영상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감격스러웠다. 미국에 와서 보게된 국군의 날 행사였기에 그 감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포항시 해병대 제1사단(해병 1사단) 인근 영일만에서 열린 ‘제73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는 해병대를 특히 예우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시 맹세문을 낭독한 해병대 1기 이봉식 옹을 보면서 내 집안의 해병대 용사들을 떠올렸다. 1965년 첫 파월 장병인 돌아가신 친정 아빠, 72년 파월 장병인 작은 아빠, 그리고 해병 2기인 십 여년전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가 그들이다. 공교롭게도 우리하이 유에스 강남중 회장도 해병대 출신이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건조된 잠수함과 수송함 등을 보면서 세계 6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내 나라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해외에 나와 있으면 그 어느 때 보다도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번 국군의 날 행사와 최근 발표된 우리기술로 제조된 첨단 무기들의 위용을를 보며 이 글을 쓰다 보니 문득 몇 년전 트럼프 대통령이 1박 2일의 일정의 한국 방문 중, 켐프 험프리스 에서의 모습과 한국 국회에서의 연설이 오버랩됐다. .
후일 생각해도 첫날 캠프 험프리스에서 양국 대통령이 양국의 젊은 장병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스케줄을 짠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그 맑고 밝은 청년들의 눈을 보면서 이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몰아넣을 지도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날 트럼프의 얼굴에선 아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무리 트럼프가 강심장이라해도 자신이 연신 칭찬할 정도로 멋지게 지어놓은 군사 시설물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촉 즉발 위험했던 그때 많은 이들이 트럼프를 환영했고 충심을 다해 접대했던 것은 그가 이 지구상에서 한반도를 전쟁의 참화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위험한 능력을 가진 두 사람 중 하나였다는데 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날 화면에 비춰졌던 똘망똘망한 생떼 같은 양국의 어린 군인들과 그 잘 지어놓은 시설이 제일 먼저 희생되고 잿더미가 될 것이 자명하다.
그날 양국의 대통령 사이에 앉아 있었던 잘 생긴 한국 병사에 대해 관심이 집중됬었다.
처음엔 카투사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군복 팔뚝의 태극마크며 한국명찰, 한국 계급장으로 보아 한국군 병사였다. 한미 연합사 직속에는 한국 부대도 있단다. 화면을 보니 그 청년 병사는 트럼프 대통령과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는데 아마 유학파 이거나 재외동포 출신으로 여겨졌다. 그만큼 우리 군의 저변이 넓어 졌다는 얘기다. 이런 청년들을 전쟁으로 잃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장면을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었다.
역시 우리의 바램은 이루어 졌는지 트럼프는 당시 방한의 만찬사며 국회 연설에서 위험한 돌출 발언을 하지 않았다. 국회 연설에서도 우리의 번영을 칭송하고 북한의 참상을 알리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당시 방한기간엔 날씨까지도 우리 편이었다. 당초에 없던 이른 아침의 DMZ 방문에 나섰지만 안개 때문에 착륙하지 못하고 다시 기지로 돌아왔다고 하지 않던가. 양국 대통령이 DMZ에 서서 쌍안경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북한을 엄청나게 자극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양국 대통령이 이 날 못 간 DMZ를 그 후 몇 달 뒤 남편과 함께 다녀왔다. 남한 땅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와 통일 전망대를 다녀왔던 것이다. 건봉사에서 열린 통일 음악회에 참가했고 사찰 뒤쪽 등공대에 올라 부도탑에 대고 기도했었다. 그 부도탑은 마치 자동차의 본넽 처럼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 떨림, 그 기(氣)에 손을 대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럭비공 같은 트럼프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튈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 기도가 통했을까. 그때 방한에서 보여 준 트럼프는 아빠 미소와 함께 절제된 연설과 호방한 태도를 보여준 멋진 미국 대통령이었고 매일 찌푸리고만 다니는 줄 알았던 그의 부인 멜라니아 여사도 어린이들과 함께 시종일관 엄마 미소로 환하게 웃으며 덕담을 던질 줄 아는 맵시 좋은 모델 출신 퍼스트레이디의 모습을 보였었다. 그리고 지금은 부질없는 해프닝 쯤으로 여겨지게 된 세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어쨌든 전쟁의 참화는 피할 수 있었지 않았는가.
그날 오른 등공대는 민간인 통제 구역이었기에 군인 둘의 안내를 받았었는데 일등병 한 명과 소대장이라지만 너무나 앳띤 소위 한 명이었다. 가장 힘든 곳이라고 알려진 22사단 민통선 부대원들이다. 그래서인지 가슴이 짠했었다.
오늘 유튜브에서 젊은 해병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등공대의 두 병사들의 애틋한 눈망울이 겹쳐지면서 결코 저 땅에 전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야 했다.
우리가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나약해서가 아니다. 북핵 해결에 전쟁은 결코 해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쟁을 막을 힘은 비축해야 하고 비축돼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는 말에 나에게는 재2의 생일과 같은 국군의 날을 맞아 다시금 힘찬 박수를 보낸다.
뉴욕 하이유에스코리아 안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