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 신앙생활을 할 때 늘 염두에 둬야 할 것 중의 한 가지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말아야 할 영구불변한 진리가 있는가 하면 시대적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를 주어 적용해야 할 사안들도 있습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의 진리입니다.
(베드로전서 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구원의 도인 복음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복음의 절대성이 희석되거나 왜곡된 사례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시절에도 이미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일례로,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을 왜곡함으로써 사도 바울의 신랄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서 1:6-12)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구약의 율법을 고수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며, 믿음과 함께 할례와 같은 구약의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혼합주의(syncretism)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저주’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쓰면서까지 이러한 자들을 경계하라고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길 외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러한 복음의 진리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 진리의 절대성을 상대화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종교와의 대화라는 미명 하에 종교다원주의가 서서히 정통교회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왜 기독교만 구원의 종교냐? 너무 배타적이지 않느냐? 너무 독선적이지 않느냐? 기독교는 그저 많은 구원의 종교 중의 하나일 뿐 유일한 구원의 종교는 아니라는 주장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으며, 구원의 도리를 알지 못하는 얼치기 신자들도 이에 동조하고 나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타종교와의 대화, 말만 들으면 참으로 근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즘 한국의 급진적인 목회자들 중에는 절에 가서 설교를 하고 스님들을 모셔다가 교회에서 설법을 하도록 하면서 강단 교류를 시도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이러한 목회자들이 참으로 멋져 보입니다. 포용성이 있는 목회자로 비쳐집니다. ‘기독교만’이라고 주장하는 ‘만만주의’보다는 ‘기독교도 불교도 회교도’라는 ‘도도주의’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타종교와의 대화나 강단교류 자체 보다는 그러한 처신으로 인해 복음의 절대성이 훼손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즘의 사회적인 풍조는 세계 제 2차 대전 후 권위주의적이고 이성주의적인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 20세기 후반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후기 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영향을 받아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절대성 보다는 상대성을, 통일성 보다는 다원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기독교가 점차 종교다원주의의 영향권 안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구원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배타성을 부정합니다. 미국에서도 여러 종교들의 연합체인 ‘Interfaith Group’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으며, 이들은 한 주간 중에 어느 한 날을 정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참 잘하는 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풍조가 사탄의 교묘한 술책임을 간파할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마귀)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연합이니 통일이니 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누구와 연합하며 무엇을 중심으로 통일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운동 중에 ‘New Age 운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고대 바벨론 종교와 초대교회 시절의 영지주의 그리고 힌두교와 불교 등 잡다한 종교들을 혼합시켜 거기에다가 적당히 기독교적인 색체를 덧입힌 전형적인 혼합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다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함으로서 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누구든지 해탈을 통해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며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뉴에이지는 윤회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도 메시아도 아닙니다. 석가모니, 모하멧, 소크라테스와 같이 그저 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기독교에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되어야 하는 것들 즉 변할 수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구원의 진리, 생명의 도는 결코 변개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영적 지혜를 하나님께 구함으로 잘못된 사상에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