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frame)은 원래 ‘틀’ 또는 ‘테두리’라는 뜻인데, 그 의미가 발전하여 인간이 성장하면서 생각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생각의 처리방식을 공식화한 것을 의미합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공식을 이용하면 쉽게 문제를 풀 수 있듯이, 사고를 하는 데 있어서도 일정한 공식이 있으면 보다 쉽게 정리를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즉 자기 나름의 프레임을 갖고 있다면 어떤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그 프레임을 이용해 보다 수월하게 생각을 정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은 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목회자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까지라도 평소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곁길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부터 제 나름의 ‘신학의 프레임’이 있었습니다. ‘좁고 넓게’라는 프레임입니다. 그 당시 저의 생각을 전개한 글이 신학교 학보(學報)에 실린 적도 있습니다. 저는 이 프레임을 저의 멘토인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사도 바울은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는 극히 ‘좁은’ 테두리로 한정했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비교적 ‘넓은’ 테두리를 허용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논증해보겠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도(道)에 대해서는 한 치의 융통성도 결단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자기가 주님께로부터 계시 받은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지어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매우 엄혹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도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와 같이 복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입장은 매우 단호하며 철저했습니다. 일말의 양보도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에 물타기를 해서 복음을 희석시키고 변질시키는 일은 하나님께 저주받을 일임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영구불변의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사항에 대해서는 매우 유연한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고린도전서 9장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의 사역의 일차적인 관심은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절대적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매우 유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의 입장을 배려하고, 때로는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의 입장을 배려하고, 때로는 약한 자 즉 아직 믿음이 약한 자들의 입장을 배려하느라 고심을 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우상 제물(祭物) 먹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그의 유연한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상 신들은 인간이 만든 허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우상 신들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고 안 먹고는 구원과는 상관없는 상대적인 교훈에 불과했습니다. 즉 절대적인 불변의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상 제물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지만, 만에 하나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아직 그러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자 즉 믿음이 연약한 자가 시험을 받게 된다면 그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이므로 자기는 평생 고기(meat)를 먹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융통성이 있는 배려의 사람이었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융통머리가 없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변할 수 없는 것과 변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유연한 태도 때문에 자칫 아무런 원칙도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기회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을 소지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속 깊은 동기를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도록 하려는 구령의 열정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배려의 마음을 우리는 높이 사야 할 것입니다. 그는 본질이 아닌 것에 목을 매는 고지식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서로 다투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싸워야 마땅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 어거스틴의 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17세기에 마르코 안토니오 도미니스 대주교가 그의 ‘교회론’에서 처음 사용했다는 다음의 유명한 말이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in necessaris unitas),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in unnecessaris libertas), 그리고 모든 것에는 자비를(in omnes charitas)”
우리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는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를 불어야 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그러나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될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를 불러야 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오늘 저는 제 자신의 ‘신학의 프레임’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각자 자신의 ‘신학 프레임’ 내지는 ‘신앙 프레임’을 정립함으로써 구체적이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조차도 소신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면 매우 유익할 것이라 믿습니다.
<서울장장로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