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총기사고가 날 때마다 총기규제에 대한 여론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방안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전국총기협회(NRA, National Rifle Association)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다수의 공화당 의원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초기 개척시대에는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광활한 땅을 개척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휴대가 필요했었습니다. 그래서 1791년에 미국 수정헌법 제 2항은 ‘무기휴대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 때와는 모든 상황이 사뭇 달라졌는데도 아직도 인권이라는 미명 하에 이 헌법을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총기휴대가 필요한 상황이긴 하지만 이제는 총기휴대를 엄격한 기준을 세워 선별적으로 허가해주어야 하는데도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총기규제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총기판매 실적이 오히려 폭발적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는 것 같아 미국 땅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은 비단 저 혼자만이 아닐 것입니다. 인종과 성별과 종교의 차별을 금지하고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소위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을 내세우며, 때로는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인권과 생명을 강조하는 이 사회가 정치자금의 덫에 걸려 총기규제에 마음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진 아이러니컬한 현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사실 폭력은 무기에 의한 폭력 외에도 매우 다양합니다. 폭력”(暴力)이라는 한자어의 원래 의미는 ‘사나운 힘’입니다. 정도가 지나쳐 사람을 해롭게 하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폭력에 해당하는 영어 violence는 힘, 활력을 뜻하는 라틴어 vis에서 온 말로서, 온 힘을 다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로 비화할 때 폭력(violence)이 되는 것입니다. 폭력은 자기중심적인 우월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무력적 수단입니다. 요즘식을 말하자면, 소위 ‘갑질’을 하려는 경향에서 파생된 비뚤어진 행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비폭력‧무저항의 삶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5:38-4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성경 전체에서 문자적으로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말씀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도 돌려 대고, 나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자에게 속옷보다 몇 배나 더 비싼 겉옷까지도 순순히 내어주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할 때 십 리까지도 흔쾌히 동행해준다는 것, 정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달라고 하는 자에게 거저 주고, 빌려달라고 하는 자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핍박하며 해코지하는 자를 위해 복을 빌어주는 것,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죽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행위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죄성을 지닌 인간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정작 실천에 옮기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eye for eye, and tooth for tooth)라는 말은 흔히 ‘탈리오의 법’(lex talionis)이라 해서 너무나 유명한 법입니다. 이 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하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말로서 모세의 율법에서도 이 탈리오의 법칙을 원용(援用)하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 율법의 원래 취지는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무제한적인 보복 즉 사형(私刑, lynch)을 금지하고 법이 규정하는 한도 내에서 보복을 제한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눈 하나를 상하게 되면 상대방의 두 눈을 상하게 하려하고, 이 하나를 상하게 되면 상대방의 이 전부를 상하게 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보복을 하더라고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보복해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저항‧비폭력입니다. 무저항‧비폭력 하면 금방 머리에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죠? 바로 인도의 성자 간디입니다.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는 그에게 ‘위대한 영혼’이라는 의미의 ‘마하트마’라는 칭호를 붙여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보통 마하트마 간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지만 성경의 산상수훈은 참으로 좋아했습니다. 그의 무저항‧ 비폭력 정신은 산상수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싫어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교훈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18세 되던 해 영국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우연히 산상수훈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산상수훈 중에서도 특히 오늘 본문에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너무나 기뻐서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 구절을 읽는 순간 그가 평소에 지녔던 확신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서 그들과 무력으로 맞서지 않고 무저항‧비폭력으로 맞서 마침내 승리하게 됩니다. 그는 폭력을 절대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폭력에 대하여 폭력으로 맞서는 것 역시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저항주의를 고수했던 것입니다. 폭력을 휘두르게 되면 또 다른 폭력을 낳게 되는 법입니다. 폭력의 악순환이 이루어지면 우리의 삶 속에 평화는 이루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6.25 동란 69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폭력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만이 폭력이 아닙니다. 전쟁 외에도 폭력은 매우 다양한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신체적인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인터넷 댓글 등을 통한 언어폭력, 감정노동자에게 무례하게 갑질하는 감정폭력, 총질 중에 가장 무서운 총질이라고 하는 ‘눈총’을 마구 쏘아대는 정서폭력,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횡행하는 성폭력 등등 폭력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고 우리를 불행의 늪에 빠뜨립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무저항‧비폭력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고난 성정(性情)으로는 정말 실천하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 즉 인간의 본성(nature)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supernatural) 능력이 요구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