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지금은 고인이 된 ‘톱스타’의 원조 신성일 배우와 함께 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은 고인이 된 신성일 배우는 필자와 긴 세월을 두고 만나며 ‘형님, 아우’하며 형제처럼 정을 나눴다. 그는 분명하고 솔직하고 자존심 강하고 언행에서도 강단이 있었다. 항상 멋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비굴한 것을 싫어하고 사나이다운 기백을 잃지 않았던 배우였다. /사진=인터뷰365
오는 4일은 故(고) 신성일 배우가 타계한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폐암 투병 중 2018년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톱스타로 기억되고 있다.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될 전망이다. 영천시는 2023년 12월 준공을 목표로 ‘신성일기념관’ 건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앞서 본지는 지난해 신성일의 아내 엄앵란 배우와 아들 석현 씨, 딸 경아·수화 씨 등 유족들이 고인이 타계 전까지 거주했던 영천시 괴연동 ‘성일가’ 부동산 유산을 영천시에 기부했다는 소식을 단독으로 밝힌 바 있다.
신성일은 1957년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진행한 신입배우 공개모집에서 2640명의 응시자를 뚫고 신인배우로 선발됐다. 1960년 ‘로맨스빠빠’로 데뷔 후 ‘맨발의 청춘’, ‘만추’, ‘별들의 고향’ 등 주연 작품만 507편에 출연하며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톱스타로 명성을 떨졌다. 연기 뿐 아니라 영화 연출과 제작에도 활약하며 다재다능한 재능을 드러냈다.
신성일과 40여년 교유 노(老)기자의 비망록
인터뷰365 김두호 기자 = 2018년 11월 6일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에 활동한 ‘톱스타’의 원조 신성일(1937∼2018)은 몇 줌의 재가 되어 만년의 거처로 삼았던 경북 영천시 근교의 자택 ‘성일가’(星一家) 잔디밭 정원으로 돌아갔다. ‘배우의 신화, 신성일 여기 잠들다’를 비문으로 새겨 얹어놓은 사각의 작고 차가운 대리석 밑에 홀로 잠들었다.
스스로 ‘성일가’로 명명한 산자락 밑의 집 한 채는 생전에 주인이 직접 강원도에서 실어 온 주문 목재로 공들여 지은 한옥이다. 마루 밑에는 아주 작은 연못도 있다. 몇 번 그 집을 방문한 기자가 이건 왜 이곳에 만들었느냐고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내 사주에 오행중 수(水) 없어 기복이 많으니 물을 가까이 두면 좋다 해서 만들었다”고 대답했다.
한국영화 인물사(人物史)에서 영화배우로 은막을 통해 관객들에게 꿈과 사랑을 전파하며 전무후무한 인기를 누린 신성일이지만 마지막 그가 떠나는 시간과 장소는 평범한 보통사람의 작별과 차이가 없었다.
기자는 신성일의 강건한 정신력을 아버지 곁에서 간병생활을 하고 임종을 지켜본 사랑하는 외아들 강석현(영화배우)을 통해 유언으로 남긴 말을 전해 듣고 새삼 절감했다.
의식을 잃지 않았을 때 스스로의 병세를 자각하고 “꼭 (김두호에게) 연락해 행사에 참석 못할 것 같다고 전화하라는 말씀이 있었다”는 말을 아들이 기자에게 전해준 것이 별세 하루 전날인 11월 3일 낮이다.
기자는 불과 5일 전 쯤 “꼭 참석할테니 걱정마라”라는 전화를 해준 아버지에게 지금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고, 아들은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실 것 같지 않다는 황망한 상황을 전해왔다. 신성일이 꼭 참석키로 한 행사는 기자가 임원으로 주관하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주최 ‘제8회 아름다운예술인상’ 공로예술인상 시상식 행사였다.
타계 닷새 후인 11월 9일 서울 명보아트홀에서 개최된 이날 시상식에서 수상자의 상패와 시상금은 부인 엄앵란 여사와 함께 참석한 큰 딸 경아, 아들 석현 가족들에게 따뜻한 기립박수 속에서 전달되었다.
빈소를 찾은 문화예술인들과 정치인을 비롯해 식사 그릇을 비우고 간 각계 문상객이 1000여 명이 넘었다.
극적인 장면은 양재동 서울추모공원에서 고인의 뒤를 휠체어에 의지해 뒤따르는 아내(엄앵란)가 마지막 작별의 순간을 맞이할 때 어디선가 흘러나온 구슬픈 섹소폰 연주 음악이었다. 적멸과 이승의 경계선에서 작별을 나누는 엄숙한 공간을 잔잔하게 흔들어 놓으며 섹스폰을 불어 준 노신사도 지방 어디선가에서 온 고인의 흘러간 올드팬이었다.
신성일은 2000년 대구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되었을 당시 기자에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난 기자 체질이지 정치와 거리가 멀다”고 거절하자 “그럼 당신 같은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하여 기자가 추천해 준 지인을 보좌관으로 채용한 일화도 있다.
타계하기 불과 한 달 전만해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씩씩하게 밟고 걸으면서 박수갈채를 받았던 신성일은 결국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의 말기 암을 극복하지 못하고 떠났다.
인간 신성일의 매력 중에 기자가 곧잘 감동하는 부문은 챙겨야 할 의리나 예의는 철저하게 지킨다는 점이다. 경조사가 있을 때 그는 잠시 얼굴만 비쳐주고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혼주나 상주의 가까이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할애하는 미덕을 실천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기자의 가족 혼사 때 처음부터 끝까지 식장 앞자리에 앉아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영화배우와 기자. 40여년을 두고 변함없이 정을 나누며 살던 신성일 영화배우는 의사가 포기한 중병을 안고 살았지만 한 번도 환자의 기색을 보여주지 않고 당당하게 1년을 살고 어느 날 갑자기 떠났다.
그의 못다 쓴 회고록을 노(老)기자는 다음 세상에서 쓰겠다는 약속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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