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on: Oct 26, 2019
미국사회에는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죽음과 세금이다.” 이 말은 미국에서 세금포탈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인 죽음을 원용(援用)한 격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비켜갈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9:27). 마찬가지로 늙는 것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늙지 않고 죽지 않을까 열망하며 여러 방도를 강구하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러 제주도까지 사람을 보냈지만 결국 수많은 용마병과 함께 거대한 무덤에 묻혀야만 했습니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하여 심지어 미래에는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간혹 있긴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무례함을 결코 묵과하실 분이 아닙니다. 고령사회에 노인학/노년학(老人學/老年學, gerontology)이 그 어느 때보다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이 학문은 노화에 대한 사회학적, 심리학적, 인지학적, 생물학적 관점에 대한 연구로서 매우 유용한 학문이지만 분명히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장수시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100세를 넘기는 인구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에 때맞춰 이애란 가수의 ‘100세 인생’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그 가사의 내용이 대충 이렇습니다.
“염라대왕이 부르러 오거든 60세는 아직 젊어서, 70세에는 할 일이 아직 남아서, 80세에는 아직은 쓸 만한데다 자존심 상해서 못 간다고, 90세에는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고, 100세에는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하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또 넘어간다.”
100세에 좋은 날 좋은 시에 가고 싶겠지만 그게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입니다. 학창시절에 배웠을 시조 한 편을 소개합니다. 고려시대 충선왕 때 우탁이 늙음을 한탄하는 ‘탄로가(嘆老歌)’입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하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나훈아 가수가 부른 ‘고장난 벽시계’도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원망하는 노래입니다.
“세월아 너는 어찌 돌아도 보지 않느냐, 나를 속인 사랑보다 니가 더욱 야속 하더라, 한두 번 사랑 땜에 울고 났더니, 저만큼 가버린 세월,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그러므로 우리는 늙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할 게 하니라 일단 늙음을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젊음이 내 노력의 보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과오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늙음이 자연의 순리일진대 이제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늙음을 맞이하고 어떻게 노년을 보내야 할 것인지를 궁구(窮究)하는 것입니다. 요즘 유튜브나 SNS(미국에서는 Social Media라고 함)에는 노년의 건강에 관한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최근에 유행하는 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입니다.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들도 있어 헷갈리긴 하지만 신중하게 선별해서 자기 것으로 취하면 도움이 되는 내용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공통되는 내용은 건강을 위해서는 걷는 것이 가장 좋다는 조언입니다. 노년을 즐겁고 보람차게 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건강해야 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 약국에 가면 이런 문구가 붙여져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는 것은 모두 잃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성자급(級)에 해당하는 어느 목사님이 계셨는데, 하루는 이 분이 방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회개하시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궁금해서 문에 귀를 대고 들어보니 평소에 건강을 잘 챙기지 못하고 무리한 탓에 병이 들어 하나님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하여 통회자복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렇죠. 건강해야 하나님의 일도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늘 부지런하고 매사에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오래 사는 것도 좋지만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복된 인생입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2세인데, 병을 지니고 보내는 유병(有病) 기간 17년을 제하면 고작 65세가 건강하게 사는 나이가 되는 셈입니다. OECD 국가 중 유병기간이 가장 긴 나라가 한국이라는 통계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골골 80’이니 ‘일병장수’니 하는 말도 병을 앓는 자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말들이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다 ‘무병장수’를 바랄 것입니다. 무병이든 유병이든 건강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움직이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4고(四苦)’라고 하는데, 요즘 노인들에게는 또 다른 ‘4고(四苦)’가 있습니다. 빈고(貧苦), 고독고(孤獨苦), 병고(病苦), 무위고(無爲苦)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무위고(無爲苦)’는 할 일이 없는 괴로움을 뜻합니다. 할 일을 찾아 부지런하게 살되 현실을 인정하면서 나이에 맞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라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역시 나이는 못 속여’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늙음을 순리로 받아들이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젊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노년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나이가 몇이지?”(How are you old?”라는 질문 대신 “몇 살로 느껴?“(How do you feel?)라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면서 매순간 젊게 살려는 ‘푸른 신앙’을 함양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시편 92:12-14)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한때 절세미인이었던 배우들의 늙어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곤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어요? 누가 세월을 거스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왕 이렇게 된 것 젊게 살려고 노력해야죠. 그러려면 억지로라도 늙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늙음을 ‘좌절’이 아닌 ‘기쁨’으로 보려고 의식적으로 애써야 함을 해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대머리가 되니 빗이 필요하지 않고, 이가 없으니 치통이 사라지고, 눈이 어두우니 공부를 안 해 편하고, 귀가 안 들리니 세상 시비에서 멀어지며, 붓 가는대로 글을 쓰니 손 볼 필요가 없고, 하수들과 바둑을 두니 여유가 있어 좋구나.”
어떤 분이 말하기를 65-75세의 10년을 인생을 여유롭게 관조(觀照)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golden time of life)라고 했는데, 그 시기에 접어든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이 갑니다. 그래서 이 황금기를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그래서 인생 만년에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그 고백을 저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I have kept the faith.”
서양 사람들은 fight, finished, faith의 첫 글자를 따 ‘3F’라고 말하는데, 우리 모두 마지막 순간에 ‘3F’의 삶을 살았노라고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매순간 성실한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삶은 결국 순간들의 합(合)이니까요. 하나님은 벼락치기로 인생의 성적을 올리기보다는 평소에 꾸준하게 성실히 노력하는 가운데 내신성적을 올리려는 노력을 귀히 보시리라 믿습니다. 특히 한국사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well-being, well-living의 삶도 궁극적으로는 well-aging, well-dying을 위한 삶에로 귀결(歸結)될 것입니다.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