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노동은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많은 사람들이 노동은 힘이 드니까 저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동을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로 창세기 3장을 잘못 해석해서 그런 주장을 펴곤 합니다.
(창세기 3:16-17) “(여호와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노동에 대한 서양인들의 생각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에는 노동을 천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그리스인들은 노동을 저주로 여겼으며, 지배층인 자유인들이 아니라 하층 계급에 있는 노예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어로 노동 또는 일이라는 단어와 슬픔 또는 비탄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같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영어 labor라는 단어가 노동, 일이라는 의미와 함께 고역(苦役), 산고(産苦)의 의미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마 이런 전통적인 어의(語義)의 반영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를 즐기는 것을 생애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여가를 즐기는 데 방해가 되는 육체노동은 자유인에게는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술자(쟁이) 또는 상인으로 사는 삶은 매우 천박한 인생이라고 매도해버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동천시 사상은 그 사회가 단순히 노예사회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노동에 대한 그들의 철학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원론에 빠져 있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정신적인 이데아 세계는 고상하고 물질세계는 저속하다는 생각에서 육체노동을 경멸했고 따라서 그 저열한 육체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노동을 천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희랍의 이원론적인 사상이 중세시대에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일을 신성한 일과 세속적인 일로 양분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하고 명상하고 말씀 묵상하는 일은 성스럽고 고상한 일이요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세속적인 일은 속되다는 이원론적 사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그리스•로마시대의 사상에다 종교적인 채색을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세 로마교회가 타락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잘못된 노동관에 기인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루터(Martin Luther)와 깔뱅(John Calvin)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개신교의 노동윤리가 점차 확립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신교의 노동관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상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소명직업관’이라고 합니다. 직업을 의미하는 단어들 즉 독일어 Beruf, 영어 vocation과 calling이 바로 이러한 사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공무원들이 어떤 중요한 직책에 임명된 후 부임인사를 할 때 늘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중차대한 직무를 맡게 되어 무척 어깨가 무겁습니다. 부족하고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해
이 소명을 잘 감당하겠습니다. 부디 성원해 주시길 간곡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소명(召命)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왕의 명령’(a royal summons) 또는 ‘신의 부름’(divine calling)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직업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 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의 생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웃을 섬기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흔히 신학자들은 창세기 1:26-28을 가리켜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합니다.
(창 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들과 차별화하셨습니다. 유독 우리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목적이 있겠지만, 그 중의 중요한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리라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라는 일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물들을 맡아 위탁관리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관리인(manager)으로서 관리(management)를 잘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주인(owner)은 물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인 대신 관리의 직무를 위임(empower)하셨습니다. 그래서 ‘문화명령’을 ‘문화위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성경은 노동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구분해서 말씀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편의상 구분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아이디어는 아닙니다. 성경은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다 그저 ‘일’(work)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터의 말은 모두가 깊이 새겨봄직한 말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사나 수녀들이 가정주부나 소매업자들보다 더 거룩한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한 소녀가 음식을 요리하고 집안을 청소하고 그 외 집안일을 하는 것이 아주 하찮은 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 거기 있으니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수도자와 수녀들의 고행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로서 마땅히 칭송받을 일이다. 세속적으로 보이는 이 일들이 곧 하나님을 향한 예배요, 기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이다.”
또 틴델(William Tyndale)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겉만 보고 평가한다면 접시를 닦는 것과 설교를 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면으로 평가한다면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일은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인류와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 구상해 놓으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한 부분입니다. 루터는 “인간은 타락 이전에 그저 놀면서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신 것이지 결코 인간을 괴롭히시기 위해 노동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만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고통과 수고가 더해졌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농부들이 농사를 지을 때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잡초와 씨름을 해야 하니 일이 더욱 힘들고 고달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노동 자체는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할 일이 없는 무위(無爲)가 고역이라는 것을 실제로 경험해보신 분들은 일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요즘 장수시대에 ‘노년의 4고(苦)’가 회자되곤 합니다. 무전고(無錢苦), 병고(病苦), 고독고(孤獨苦), 그리고 아무 할 일이 없는 고통 즉 무위고(無爲苦)가 바로 노년의 네 가지 고통입니다. 안식이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고안해내시고 지키도록 명하셨듯이 노동도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고안해내시고 지키도록 명령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친히 고안하시고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노동관입니다.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랍비들은 비록 율법을 연구하고 복사하고 가르치는 선비였지만 반드시 생계를 위해 별도의 생업을 익혀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학문으로 말하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대의 대선비였지만, 자신의 생업으로 천막 만드는 기술을 익혀두었습니다. 생업으로 익힌 그의 천막 제작기술이 후일 자비량(自費糧, one’s own expense) 선교를 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들여 선교하는 자비량 선교를 흔히들 ‘tent-making mission’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도처에 근면의 미덕을 강조하고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으며, 이 말씀은 곧 가나안 농군학교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노동절 연휴를 맞아 그 동안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Happy Labor Day!
<서울장로 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