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년 전에 『그대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돼 특히 스스로 늙어간다고 불안해하며 실망에 젖어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오평선 씨는 은퇴를 목전에 둔 시점에 이직을 하고 다시 한 번 열정을 불사르고 있었기에 더욱 공감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100세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2015년에 UN에서는 전 세계 인류의 체질과 평균수명을 토대로 연령분류를 5단계로 나누어 새로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발표에 의하면, 0세~17세 까지는 미성년자, 18세~65세 까지는 청년, 66세~79세 까지는 중년, 80세~99세 까지는 노년, 100세 이후는 장수노인으로 분류됩니다. 바야흐로 ‘호모 헌드렛’(Homo Hundred) 시대가 도래(到來)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썩 공감이 가지는 않지만 나름 방대한 객관적 자료와 정보를 가지고 분류한 것일 테니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 분류에 의하면 저는 이제 중년의 초년생에 해당되는데 어쩐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옛날 같으면 노년인데 아직 중년의 초입에 들어서 있다니…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니 그리 불평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노년보다는 중년이 좋으니까요. 요즘 미국에서도 “How old is old?”(도대체 얼마나 늙어야 늙은 거야?)라는 질문을 하며 자주 토론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유명인사들의 사망기사를 보면 물론 단명(短命)하는 예도 없진 않으나 80세를 넘기는 경우가 흔하고 90대에 사망하는 예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니 장수시대가 된 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장수하는 것 자체야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3대 거짓말 중에서 노인이 “나 빨리 죽고 싶어”란 거짓말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미국 사람들도 “I am 70 years young.”이라는 식으로 말하길 좋아합니다. “참 곱게 늙으셨네요.”라고 말하면 “그냥 곱다고 하면 안 되나? 늙었다는 말을 굳이 해야 돼?”라고 불쾌해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골골하면서 오래 사는 고생스러운 삶을 은근히 비꼬는 말로 “재수 없으면 100살 살아!”라는 말도 한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장수시대가 된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수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책의 제목처럼 단순히 육신적으로 늙어만 갈 것이 아니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적으로 익어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요즘 한참 과일이 익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익어간다는 것은 성숙해진다는 뜻입니다. 풋과일이 풍상에 시달리며 빨갛게 노랗게 익어가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마음조차 풍요로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소담스러운 열매들을 보면서 나도 저 과일들처럼 무르익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가져보곤 합니다. 장수시대를 맞이했으니 시류에 편승해 당연히 오래 사는 것을 바라야겠지만, 오래만 살 것이 아니라 잘 살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벤자민 플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오래 살기를 바라기보다 잘 살기를 바라라.”(Wish not so much to live long as to live well.)고 했습니다. 교회사에서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불리는 영국의 부흥사 조지 휫필드 목사님(George Whitefield)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겠다.”(I would rather wear out than rust out.). 이러한 말들은 다 ‘익어가는 노년’이 어떠한 것인지를 은연중에 잘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은퇴와 관련해 가장 흔하게 하는 말이 ‘은퇴는 retire가 아니라 re-tire이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은퇴는 퇴물이 되어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새롭게 출발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평균 기대수명이 85세 이상 되는 장수시대에는 이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미국에서는 은퇴연령이라는 게 없지만 한국에서는 은퇴연령이 너무 일찍 오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한참 일할 나이에 그만 둔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나이입니다. 한국에서도 현재 각종 법령에서 65세로 되어있는 노인의 기준을 70세로 올리는 방안이 추진 중에 있다고 합니다. 저는 한 교회를 28년 시무한 후 조기은퇴를 했습니다. 은퇴하자마자 곧장 제 2의 인생(the second life)을 준비하기 위해 목회학 박사 과정에 등록해서 지금도 공부하고 있고 이제 이번 가을학기로 코스워크가 끝나면 논문을 준비해야 합니다. 시무하는 동안에는 이래저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뤄두었던 공부를 뉘늦게나마 만학도(晩學徒)가 되어 시작하게 되었는데, 제 인생 가운데 참 잘한 선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위와 상관없이도 배우는 일을 무척 좋아합니다. 논어의 첫머리에 공자님의 세 가지 인생의 기쁨이 나옵니다. 그의 인생삼락(人生三樂) 가운데 ’배움의 기쁨‘이 있습니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그래서 저는 멀리까지 가지는 못해도 이 지역에서 열리는 세미나 중에서 내게 유익하고 관심이 가는 세미나는 가능한 한 참석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냥 지식만 익히자는 목적이 아니라 내 삶의 자양분을 삼고 혹 앞으로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더 풍부한 지식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인간이 사회적 갈등과 위기를 통해 발달한다는 심리사회적 발달이론을 정립한 발달심리학의 대가이며, 그의 ‘8단계 발달이론’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60대를 전후에 시작되는 노년기의 기간이 다소 길다는 비판을 받아오던 중 그 자신이 80대가 된 이후 아홉 단계로 수정했고, 그가 사망 후 그의 아내가 유고를 정리해서 9단계를 추가해 『인생의 아홉 단계』라는 제목으로 증보개정판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삶 전체가 자기성숙의 과정임을 강조하면서 특히 노년기는 다음 세대를 위해 ‘지혜의 문’을 여는 시기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노년기는 ‘받는 존재’로 태어나 ‘주는 존재’로서 이 세상을 떠나는 시기이므로 사실상 죽음 그 자체가 하나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노년을 지혜와 간접적으로 연관시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19:99-100) “내가 주의 증거들을 묵상함으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우리는 나이 들었다고 뒷방 늙은이 행세를 할 게 아니라 늘 배우며 자신을 새롭게 경신함으로써 후진들에게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도록 멋지게 ‘익어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노망(老妄)이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에는 전진이 있을 뿐 퇴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중단 없는 전진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신앙 정진에 힘쓴 분이었습니다.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