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유에스코리아뉴스
Featured 교회소식

[김재동 원로목사 신앙칼럼] 신앙인가, 신념인가

Apr 27, 2019 서울장로교회 김재동 원로목사

우리는 자칫 신앙과 신념을 혼동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얼핏 비슷한 것 같으나 사실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혹 경우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개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념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고수하는 것을 뜻하며, 반드시 자신의 의지가 동반됩니다. 강한 의지가 없이는 신념을 실행에 옮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신념이 강한 사람은 칭찬할만한 위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념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신념에는 사실에 바탕을 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신념이 있는가 하면,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신념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히틀러는 신념의 사람이었지만, 그릇된 신념의 소유자였거나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짐짓 그러한 신념으로 자신을 포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그의 왜곡된 신념은 역사상 엄청난 비극을 낳게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지·정서·행동 치료법(REBT)의 창시자인 미국의 심리학자 앨리스(Albert Allis)는 히틀러의 행동을 그의 공식에 따라 분석한 적이 있는데, A, B, C로 정리를 했습니다.
A는 Activating Event(선행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 독일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현실을 적시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이 비록 소수지만 독일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을 선행사건으로 본 것입니다.
다음으로 B는 Belief(신념)입니다. 만일 히틀러가 합리적인 신념을 가진 자였더라면, “기분은 나쁘지만 어쩔 수 없지. 우리 독일인들이 더 분발하는 수밖에…”라는 생각을 가졌을 텐데, 불행하게도 그는 비합리적인 신념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 녀석들을 처치하고 경제권을 빼앗아버려야지”라는 생각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C는 Consequence(결과)입니다. 그의 비합리적인 생각의 결론은 유대인들로 인해 독일인들이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내세워 인종청소를 감행하게 되는데, 자그마치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처참하게 죽어갔고, 많은 유대인들이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위시해 집시족 같은 열등한 민족과 장애인 인구가 더 이상 늘어나지 못하도록 아예 씨를 말려버리는 단종법(斷種法)을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히틀러의 예를 통해 잘못된 신념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신념이 수많은 사람들을 비참한 삶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바른 신념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념이 아무리 바르다고 해도 신념은 신앙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과 신념의 차이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신념은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 이어 2차 전도여행에서도 1차 전도여행의 경로를 따라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전도를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판단에는 같은 지역을 방문해서 성도들의 신앙을 다지고 교회를 더 안정시키는 게 바른 처사라는 확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이러한 생각을 막으시며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6:6-7)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이것이 과연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인가 아니면 나의 주관적인 생각인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칫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 같은데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일 때도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재가(裁可)받기 위해 기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바울도 인간인지라 그러한 위험에 빠질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보다 객관적인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6:8-10)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 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일종의 재확인(double check)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보여주실 때도, 그리고 바로의 꿈과 관련해서도 재확인의 방법을 사용하신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시키시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난 후 자신의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튿날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건너가 마게도냐의 관문 도시인 빌립보에 이르렀고, 그 곳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드디어 루디아라는 여성을 만나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과 구상과 계획과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No!’라고 하시자 지체없이 자기의 뜻을 접고 성령님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유행하는 ‘내려놓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자기의 학식, 명예, 재산 등등을 포기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굴종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내 의지, 내 뜻, 내 고집, 내 신념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념은 자기 자신의 가변성(환경과 조건의 변화)과 의외성(하나님의 개입이나 타인의 영향)에 의해 제한을 받습니다. 그래서 한계에 부딪히면 실망하고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신앙은 비록 내 뜻대로 성사되지 않더라도 실망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셨듯이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믿는 자들의 신앙적인 자세입니다. 우리 모두 ‘신념이 아닌 신앙으로’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