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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원로목사 신앙칼럼]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인간이로다!

프랑스의 철학자 빠스깔은 그의 수상록인 『빵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생각하는 갈대’라는 짧은 한 마디 속에는 산들바람에도 흔들리는 인간의 연약함과 사유(思惟)할 수 있는 인간의 강함이라는 상반된 두 개념이 함축돼 있습니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한 방울의 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에 우주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 곧 바로 숙부와 재혼해버린 어머니의 나약한 정신 상태를 질타하면서 이렇게 독백합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Frailty, the name is woman!)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도 꼭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인간이로다!”(Frailty, the name is human!)

육신에 관한 한 인간은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요즘 우리는 우리 일생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죽음의 비보(悲報)들을 접하면서 인간의 나약함을 새삼 절감하고 있습니다. 때로 인간의 목숨은 참으로 질기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모진 목숨’이라는 말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빠스깔이 언급했듯이 인간은 대체로 갈대처럼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에 와서 100세 시대를 구가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역시 인간은 유한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편 저자는 인간의 연약함과 덧없음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39:4-5)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年限)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인간은 너나없이 할 수만 있다면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기를 소망합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19C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Herbert Spencer)는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방공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은 누구나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미국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과 세금, 이 두 가지는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탈세방지를 위해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인 죽음을 끌어다 쓴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또 죽음의 필연성을 강조한 라틴어 중에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흔히 ‘carpe diem’(현재를 잡으라), ‘amor fati’(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말과 함께 라틴어 3대 명언에 속하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세 가지 명언이 모두 인간의 유한성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memento mori’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다음과 같은 풍습에서 생겨난 말이라고 합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이 말을 외치게 했는데,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이 엄연한 현실이듯이 죽음도 언젠가는 반드시 닥칠 엄연한 현실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히 ‘죽음’이라는 단어는 아무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금기어입니다. 오죽하면 아라비아 숫자 4도 ‘죽을 사(死)’ 자로 생각해 아파트나 엘리베이터에도 이 숫자를 기피하는 현상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그러나 요즈음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살고(well being), 잘 늙는 것(well aging)과 함께 잘 죽는 것(well dying)에도 점차 많은 관심을 갖는 추세입니다. 영국 정부는 2009년부터 매년 5월에 ‘준비된 죽음’의 중요성을 알리는 특별한 주간(Dying Matters Awareness Week)을 정해 노후계획을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나 유언장이나 장기기증 서약서 작성, 장례계획 세우기, 유산 기증 장려 등을 통해 ‘좋은 죽음’(Good Death)을 맞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말기 환자들을 위해 호스피스 시설을 확충함으로써 ‘죽음의 질 지수(Quality of Death Index)’ 조사에서 1등을 차지할 정도로 웰다잉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준비된 죽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힐다잉’(heal-dying)을 모토로 내세운 어느 센터에서는 수년 동안 수만 명을 대상으로 일종의 임종체험인 힐다잉 체험 과정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힐다잉은 치료(healing)와 죽음(dying)의 합성어로 영정사진 촬영부터 유언서 작성, 수의 착용과 입관까지 죽음의 전체 과정을 실제로 체험하는 훈련 프로그램입니다. 이러한 근사체험(近死體驗, near-death experiences[NDE]) 내지는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통해 남은 삶을 새롭게 설계해서 보다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의미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설령 이와 같은 죽음의 가상체험을 실제로 하지 않더라도 ‘죽음 이후의 삶’(after life)을 위해 신앙적으로 미리미리 알차게 잘 준비한다면 누구나 웰다잉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Published on: Apr 18,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