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25전쟁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남아 있는 6.25 전쟁은 정치적 이익을 위한 좌우 진영의 논리만 있을 뿐 차세대들에게는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대한민국을 구원했던 순국선열과 풍전등화에 있던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피 흘린 참전 용사들을 시대와 세대를 넘어 반드시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
북한의 공산주의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의 전쟁으로 대변되는 6.25 전쟁사에서 우리는 UN 참전국 중 윌튼 워커 장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북한군의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한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한반도 사수를 주장했던 UN 지상군 사령관이다.
“이 자리에서 전사하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그가 남긴 이 어록은 한국 전쟁사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두산백과에서는 “월튼 워커 장군에 대해 미국의 군인. 텍사스주 출생.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패튼 장군 휘하에 있으면서 유럽의 여러 전선에서 공을 세웠고, 1950년 6 ·25전쟁이 발발하자 미 제8군 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낙동강전투 등을 지휘하였으나, 그해 12월 서울 북방전선에서 불의의 자동차사고로 죽었다.”로 기록되고 있다.
1950년 12월 23일, 훗날 육군 대장이 되는 아들인 샘 S. 워커 대위의 은성 무공 훈장 수상 축화와 후퇴작전 중 큰 전과를 올린 아들이 속한 사단에 대한 부대 표창을 위해 짚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의정부 남쪽의 양주군 노해면(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자리)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 소속 차량과 추돌하여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하여 순직했다.
어쨌든 연합군은 낙동강 전선을 지켜냈고, 1963년 그의 이름을 딴 대한민국 최고급 호텔인 워커힐 호텔이 탄생했다. 워커힐 호텔 개관 당시 재즈의 전설인 루이 암스트롱이 그곳에서 내한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워커 장군은 서울 용산 미군기지 안 8군사령부 앞에 그를 기리는 동상으로 남았다가 2017년 4월 25일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과 함께 옴겨졌다.
그런데 역사는 참 아이러닉컬하게 움직이기도 한다.
월튼 워커 미8군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의정부 문산 간의 도로가 바로 미군이 탱크훈련 중 미선과 효순이라는 두 소녀를 치어 죽게 한 바로 그 도로이며 사고 지점도 아주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장갑차 조종수가 마크 워크 하사이다.
2002년 6월 13일 효선·미순 사망 사건이 국민들의 반미 감정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진보 진영은 정권까지 거머쥐게 됐지만, 한국민들에 의해 주범으로 몰린 워크 하사는 5년 동안을 신경안정제와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받았다고 한다.
역사는 워커 미8군 사령관의 짚차와 부딪힌 한국군 트럭 운전병을 이승만 대통령이 사형시키려 하자 미군 참모들이 적극 만류하여 사형을 면하게 해주고 대신 가벼운 징역형으로 감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미2사단 캠프 스탠리 소속 장병들은 해마다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에 있는 효순·미선 양 추모비 앞에 모여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6.25 전쟁 71주년을 맞이한 올해도 어김없이 ‘종전 선언’ 문제로 시끄럽다.
휴전 협정으로 계속 가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종전선언으로 가야 하는 것이 정답인지 몰라 국민 여론도 반으로 나뉘어 있다. 한편에서는 용서하고 감사하고, 다른 편에서는 남북 분단의 원수로 생각하고 있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한미동맹을 보는 시각 차이다는 생각이 든다.
하이유에스코리아 강남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