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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 단상 칼럼 제 8회 (한국 내 중국선교의 현주소), 이민우 선교사

중국선교 단상 칼럼 제 8회 (한국 내 중국선교의 현주소)

이민우 선교사

1882년 10월 조청(朝清)상민(商民) 무역장전 체결 이후 화교인구는 166 명 정도 였다가 1910년 한일 합방 전후로 중국본토 특히 배로 쉽게 올 수 있는 산동 성 출신의 농부, 노동자, 상인들이 조선에 오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산동성의 계속된 가뭄과 흉년으로 인해 마치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 일가와 같이 생존을 위해 이주를 시작한 것이고 물론 청일 전쟁 그 이전부터 북방지역에는 육로를 통한 만주지역을 오가는 교역 상들, 고려인삼 등 조선의 특산물과 중국의 비단 등을 맞교환 하는 무역상들이 남방으로는 멀리 해양 선을 따라 상해지역 근처 닝보등 멀리는 남방지역인 광동지역에서도 교역상들이 오간 자료들이 발견된다.

명나라 청나라를 거쳐 많은 외교사절과 군대 인원들이 조선에 들어왔다가 눌러 앉아 체류한 자손도 있다. 그래서 한국의 성씨에는 중국인 성씨가 꽤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 역대 왕조 때 중국에 사절단, 유학 등의 이유로 중국에 입국해 잔류한 한국인의 후예도 있게 마련이다. 신분으로는 왕손 귀족들의 볼모로 또는 외교상 정략 결혼으로부터 평민들까지 골고루 분포되어있다.

같은 이치로 일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일본에 입국했다가 체류하여 3대4대에 이르는 재일교포가 있지 않은가?
농업기술이 조선보다 나았고 좋은 풍토와 인심으로 농업을 하는 중국인들과 노동력을 파는 벽돌공( 당시 근대 한국의 근대 건축물 역사에 벽돌로 지은 대형 건물은 거의 화교 벽돌공에 의해 지어진 것임), 석공, 대장장이 그리고 주요 철도 역과 부두의 하역작업 근로자 들이었고, 그리고 봉제업 등 양복점을 경영하고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는 큰 부류의 중국인들이 한중 국경 근처의 도시들 뿐 아니라 조선 내륙의 주요도시 여러 곳에 분포해 체류하기 시작했고 조선의 북방지역과 남쪽 지역 골고루 분포해 생활해 나갔다.

한국에 입국 체류인구가 한때는 6만 명을 넘다가 한국 동란 6.25 바로 몇 년 직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정치 경제적 생존을 위해 대거 밀입국을 해왔고 한국전 때 남쪽으로 이주해 부산 대구 광주 등에 체류하는 인구가 많아졌고 그대로 한국전 정전 이후에도 현지에 남아 생존해 왔다.
통계기록에 의하면 지리적인 접근 성 때문에 북한화교가 남한보다 많았고 1990년 대 외국인 근로자로서 입국한 중국인들 유학생들이 급증하면서 2015년 무려 56만 명으로 증가하여 그 이전 입국해 살던 노 화교와 신 화교로 구분된다.

게다가 제주특구 개방으로 인해 제주도에 부동산 투자가 늘면서 현지 사회 문제가 빈발했고 2010년 전후 종로 대로와 전철 내에서 한국인들과 잦은 마찰, 조선족들이 포함된 살인 등의 중 범죄에 연루 된 중국인들이 늘어갔다 구로동 일대와 웬만한 공단 근처에는 중국인들을 위한 생필품 상가가 늘어났다. 신 화교들 중국인을 위한 신문 화광보(华光报)등의 신문 매체도 늘고 중국근로자에 대한 복음전도 단체들과 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조직들이 점차 늘어났다.
1912년 조선이 일본 식민지를 시작한지 2년 후부터 한국내의 화교와 일본인들이 주요 외국인이었고 일본인들은 한국보다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에서 파송한 일본인 목사들이 일본인 위주의 일본인 교회가 있었던 것에 비해 중국인들은 화교를 대상으로 하는 선교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할 때 미국 감리교 선교사 찰스 데밍의 부인 데밍여사가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 교회에서 만난 차도심 장로와 협력하여 세운 1912년 중국인 교회가 최초였고 그 후 중국에서 중국인 사역자가 몇 대에 걸쳐서 파송 되어 와 사역을 감당해왔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인 사역자가 귀국하고 부족할 때 중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한국인들과 대만에서 온 선교사들이 남한 8-10곳의 화교교회 사역을 감당해왔고 평양 원산 등 북한 지역의 화교교회 자료는 한국전쟁 이후에는 자료 수집이 어려운 상태이다.

지금도 인천 북성동 과 부산 초량동 대구 달성동 광주 익산, 군산 등이 차이나 타운을 이뤄왔는데 인천 북성동의 공화춘이란 식당이 한국식 짜장면의 원조격이다. 청나라 조 차지였던 인천에 중국인들이 대거 입국해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이다.
인천 화교교회가 1920년으로 건축되어 인천시에서 문화재 지정을 받았으나 당시 화교목사가 잘못 판단하여 건물을 부수고 상가건물을 짓고 그 상가건물 내에 교회가 입주하여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1990년대부터 2010년 대까지 중국인 근로자가 많았고 점차 한국에 유학 온 중국인 유학생들이 급증하여 웬만한 사립대학에 중국유학생이 사학재단 재정 충당에 보탬이 되어왔다.
따라서 한국의 국내 체류 외국인대상 사역 자들이 증가하여 대학마다 성경공부 등 모임이 늘고 중국인만을 대상으로 한 신학교도 몇 군데 생기고 전국에 중국 대학생대상 사역단체가 늘었고 외국인 근로자와 유학생이 늘자 그들만을 위한 의료지원을 위한 조직도 생겨났다.

마찬가지로 국제결혼 사례도 늘고 신 이민 이주민에 속한 신 화교들을 위한 한국어 강습과 문화교실 등 교회, 종교단체와 민간인권단체, 지방자체 단체 등에서 그들을 위한 지원 등이 이뤄지고 있다.
다음 9회에는 중국 내 기독교 상황을 다룹니다. 많은 관심과 기도로 기대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