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 영성으로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10년여의 세월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기독교로 귀의한 것이 장안의 화젯거리가 된 일이 있습니다. 그분이 세례를 받은 일은 기독교 언론은 물론 일반 언론에서도 뉴스거리로 삼을 정도로 한국인들에게는 큰 관심사였습니다. 아무리 고위 공직을 지낸 자라 할지라도 공인이 세례를 받았다는 개인사가 유력 일간지에 보도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시선을 받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어령 교수 하면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 지성(知性)의 최고의 아이콘(icon)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30대의 젊은 교수 시절에 논리가 명석하고 다방면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달변가요 언어의 마술사였기 때문에 대학생들 가운데 명강사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는 30대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문화 해석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석학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초대 문화부 장관에 발탁되기도 했습니다.
모 대학교의 기독교학생회 회장을 지냈던 분이 이어령 교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는 참으로 놀랍다고 생각하면서 그 당시 이 교수님을 강사로 초청해서 들었던 강의 한 토막을 소개했습니다. 그 강연에서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를 하나의 문화적인 현상으로는 인정하지만 신앙의 대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미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미신을 내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고 다만 인간사회의 문화적인 한 현상으로 인정할 따름이다.”
이렇게 말했던 분이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으니 화젯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겠죠. 그는 그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기의 지난 생애를 성장 단계별로 정리해서 책 한 권을 쓰려는 계획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자기 생애의 마지막 부분은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제목을 붙일 것이라고 밝힌 적도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을 쓴 이후에도 책 몇 권을 더 저술하긴 했지만, 이 말에서 그가 지금까지 하늘처럼 떠받들어왔던 지성을 뛰어넘는 다른 영역 즉 영성(靈性)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지성의 아이콘으로서 이성(理性)의 영역인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만을 추구하고 인정했던 그는 이제 그 영역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에 눈을 뜨면서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지성과 영성은 항상 대립된 개념은 아닙니다. 지성을 추구하는 이성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기능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칫 기독교 신앙을 반(反)지성주의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때로 성경의 내용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은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도행전 17:11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듣되 그것이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탐구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위 ‘무조건’ 또는 ‘덮어놓고’ 믿는 것보다 오히려 의문을 가지고 성경을 ‘펴고’ 하나하나 착실하게 확인해감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인간의 이성적인 추리만으로는 성경의 진리를 다 이해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이 점에 대하여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8-21)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학자)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철학자)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전도의 말씀, 케리그마)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전형적인 그리스 문화권에 속하는 대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연히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철학의 발생지라 할 수 있는 그리스는 인간의 지혜를 숭상했습니다. 그런데 철학이 무엇입니까? 필자가 대학교 다닐 때 전공에 상관없이 첫해는 교양학부라 해서 기본적인 교양과목을 공부했습니다. 그 중에는 철학개론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철학개론을 펴면 제 1과에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철학의 영어 단어인 ‘philosophy’는 ‘philo’(사랑한다, 좋아한다)와 ‘sophia’(지혜)라는 두 단어가 합해 만들어진 합성어이며, 따라서 철학은 ‘애지’(愛智) 즉 ‘지식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궤변가(詭辯家)로 분류되는 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소피스트’(sophist)라고 합니다. 원래는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를 일컫는 말로서 ‘현자‘(賢者)’를 의미했으나 후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궤변가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긴 했지만, 어쨌든 그들이 가르치는 지식과 지혜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였습니다. 그 지식과 지혜는 인간의 이성에 의한 합리성에 근거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인간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초이성적인 영역도 많이 있으며, 특히 기독교의 진리는 말씀에 의한 창조, 동정녀 탄생, 부활, 수많은 기적사건 등 이성을 뛰어넘어야 이해될 수 있는 진리들로 가득 차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신학적인 명제들이 있습니다. “유한은 무한을 내포할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이성과 신앙은 항상 대립되는 것은 아니나 많은 경우 대립되는 관계에 있다는 것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자가 서로 대립될 경우 신앙으로 뛰어넘는(take off) 길밖에 없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는 담장을 뛰어넘는 길밖에 없으니까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이성의 눈으로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does not make sense) 미련한 것(folly)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류를 구원한다는 자가 자신조차 십자가의 죽음에서 구하지 못했으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기적신앙에 물든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scandal, 재수 없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아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구원은 영원히 죽을 자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지옥의 고통을 당할 자가 영원토록 천국의 복락을 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죽을 육신의 병을 고치면 당연히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래봐야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영원한 것이니 이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하나요?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공의의 성품상 죄를 간과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을 지옥에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큽니다. 공의를 세우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세우자니 공의가 울고…이것은 분명 하나님께는 하나의 딜레마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묘안을 생각해내신 겁니다. 가히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는 묘안이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에게 인간의 모든 죄를 옮겨 대신 죄값을 치르게 하심으로써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시키시는 묘안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만이 생각해내실 수 있는 지혜 즉 ‘신의 한 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냉정한 이성의 눈으로만 바라보았던 이어령 교수님이 180도 완전히 변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명딸인 장민아 목사의 치병(治病) 과정과 자폐증을 앓고 있던 외손자의 삶 속에서 일어난 기적을 통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아버지인 나도 못 해 준 것을 하나님이 해 주셨으니 그 분이 얼마나 대단하냐. 내가 못 해주는 것을 해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냐. 나도 신앙을 가지겠다.”
세상 지식으로 머리가 굳어질 대로 굳어진 한국 지성의 대표가 74세에 세례를 받음으로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요 과학자요 수학자였던 빠스깔은 중병을 앓으면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앙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철학자나 과학자나 수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우리 인간의 가슴에는 텅 빈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은 예수님 그리스도만으로 매워질 수 있다.”
아직도 지성에 머물러 있는 분이 계시다면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하실 때에도 인간의 지식을 표준삼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고전 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과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김재동 목사(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