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단상 컬럼 11회 중국내 교포교회
중국내 교포 교회라 하면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부터 재중교포가 빈곤, 기아, 기황, 일제 횡포 등을 피해 만주로 넘어간 세대와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부터 투자를 목적으로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투자진출 지역이었던 산동성(지리적 물류 접근성의 용의로 인해)의 위해 ,연태 , 청도 일대 등 한국기업의 투자는 교포가 비교적 많이 거주했던 지역 중심으로 시작해서 동북3성 (길림성의 연길, 훈춘, 용정; 요녕성의 단동, 심양. 영구 대련등; 흑룡강성의 하얼빈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재중교포의 도움이 필요했고 물류교통의 경제적인 요인이 주된 요인이다.
필자가 처음 중국 땅을 밟은 것은 1993년 9월 한중 수교가 맺어진 다음해였다 .
당시에는 북경직항이 없어 천진으로 입국해 고속도로로 북경까지 이동하는 다소 불편한 교통편이었다. 그때 놀란 것은 공항 청사 구석에 잔뜩 쌓아놓은 운동화였는데 물어보니 러시아로 가져갈 보따리 무역상들의 생필품 물건들이라는 대답이었다.
산동성 사수(泗水)에 건설할 시멘트 공장 현장 답사를 위해 선발 준비 팀 일원으로 출장을 3주정도 갔었는데 천진 시멘트 연구소 초대소 (게스트 하우스) 에 묵으며 중국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당시 출장 팀에는 손예환 부사장(국제상사 다이어등 광산개발 사업부 전무출신을 서울대 동문회를 통해 소개받아 스카웃 된 사례)과 플랜트 프로젝트인 이유로 대우조선 김경수 사장과 동양시멘트 부사장 등 20여명이 동행했다.
천진 시멘트 연구소 초대소에 머물며 업무협의를 하는 동안 연구소 주위를 지도를 보아가며 조심스레 움직였다. 준비해간 복음 전단지를 주위를 살펴가며 우체통에 넣어봤다.
공개적인 전도가 금지되어있다고 들어와서 그렇게라도 시도를 해보았다.
천진 시내에 있는 조선족 식당에 가봤다.
음식 맛이 한국과 많이 달랐다.
그런데 한국산 진로소주가 판매되고 있어서 놀랐다.
북경역에서 기차로 산동 현장으로 가는 열차는 장거리라서 인지 방마다 침대칸이 있고 무료한 승차시간에 김경수 사장 주도하에 포커게임이 진행됐다.
시멘트 공장 예정지 사수는 공자 고향 곡부 에서 2시간도 안 걸리는 지역으로 인근 석회석 광산과 발전소를 답사해 석탄재의 확보량과 전력량 확인을 위해 미니 버스를 타고 공자 맹자 고향 등을 거쳐 답사를 시작했다.
사수 산골에는 외국인의 진출이 없던 터라
한국식당이나 조선족 식당이 없었고 고추장과 멸치 김치. 김 등의 비상반찬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아주 깊은 산골에서 사는 주민들의 생활상을 목격하고 한국과의 경제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동네 길을 큰소리로 울며 아낙네가 걸어가는 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바라보고 물으니 남편이 별세해서 슬피 울고 있다고 들었다. 측은한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복음을 전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마음속에 차 올랐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울부짖었겠지만 그런 산골에도 복음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 대원중에는 토목부장이 기독교인이었고 손예환 부사장과 건축부장이 천주교인이고 나머지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산동성 수도 제남 호텔에서 산동성 계획위원회 위원장과 김우중 회장과의 업무협의가 진행됐다.
처음 출장 길 93년도 때는 기독교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대우를 사직하고 다음해 투자목적의 답사여행이 94년 5월 인천에서 페리호를 타고 위해 를 거쳐 대련항에 도착해서 현대차로 당시 개통은 했으나 통행량이 거의 한산했던 고속도로를 마치 비행장 활주로 같이 단숨에 달려 목적지 영구(营口)에 도착했다. 그 지역에 신라주단등 주로 한국으로부터 섬유업체가 많이 투자 진출하여 경영되고 자연스럽게 조선족 교포가 장춘이나 심양 등에서 남하하여 현지 진출업체에 현지직원으로 일하는 형태였다.
영구지역 조선족 지하가정교회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험을 하였다.
여성 지도자가 찬양과 설교를 하여 좀 의아했다.
남편은 감옥 갔고 혼자 교회를 지킨다는 설명을 들었다.
교회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감시인들이 망을 보고 긴급상황에 대비해 통보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투자 진출한 한국측 파견직원과 가족들과 현지 교민들의 자연스런 교회모임이었다.
그 후 천진 심양 서탑교회 등 조선족 교회 예배에 들어가 봤는데 원칙적으로 외국인인 한국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이었고 한족 교회와 별도로 모이고 있었다.
특히 심양서탑교회는 교포가 많이 사는 중심지에 소재한 대형교회이며 로스 목사가 한글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배경의 교회였다.
규모도 컸고 근처 길가에서는 외환권( 중국 통화 인민폐를 외국인들이 사용 못하고 외국인들만이 사용할수 있는 화폐) 을 사려는 여성분들이 한화와의 교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중국교회에는 헌금함이 입구에 놓여있고 헌금봉투를 돌리는 일은 없고 교역자들은 모두 종교국 직원으로 정부로부터 생활비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온 중국근로자들이나 중국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목회자들의 수입이 어떻게 오느냐는 질문들을 많이 한다.
중국 으로 부터 농산품 수입과 한국산 화장품 등의 무역상이 많이 살던 대련시의 교포 교회도 거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다음주 12회는 중국의 교포생활의 면면관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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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