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따라 미국에 온지 4년 됐다. 미국 생활 40년 중 뉴요커로 30년을 살았던 남편과 인터넷 덕에 나는 빛의 속도로 미국 살이에 적응하고 있다.
한국의 지인들이 “ 미국 어디에 살아요?” 라고 물었을 때, 나 뿐만 아니라 내 지역에 살고 있는 대부분 사람들은 “뉴욕에 살아요.” 라고 답하곤 한다.
내가 거주하는 지역은 뉴저지 이다. 뉴욕에서 다리를 하나 건너면 시작되는 뉴저지 첫 동네 인근에 살다보니 그리 대답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일은 뉴욕에서 하고 퇴근은 뉴저지로 하다보니 뉴욕에 산다는 대답이 크게 무리는 아니라는 것이 이 동네의 공통적인 정서이다.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뉴욕의 멋진 풍경과 세계적인 미술관등이 집 앞에서 버스로 30분 거리 있다는 것은 미 동부, 특히 뉴욕 인근 거주자의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요즘 “뉴욕에 산다” 라고 말할 때 그간 내 안에 흐르던 자랑스러움은 소심함과 부끄러움으로 바뀌는 중이고 한국 지인들의 부러움 섞인 눈빛과 감탄은 우려와 동정으로 까지 바뀜을 느끼는 중이다.
“뉴욕가서 지하철 타지 말아라, 큰일날라.”
“ 언니, 뉴욕 시내 다니는거 괜찮아요? 외교관도 길 가다가 코뼈 부러진다면서요”
“OO한테 차이나타운 가지 말라고 그래, 어디 무서워 살겠니?”
“아니 왜 하나 같이 때린 사람들은 흑인들이에요? 그래놓고 무슨 BLM?”
요즘 한국의 부모님과 친구들과의 카톡에서 빠지지 않는 나에 대한 공통된 안부 인사(?)들이다.
‘예전에도 그 전에도 이런 일은 늘 있어왔어.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소식이 삽시간에 퍼지다 보니 갑자기 이런일들이 생기는 것 같은…그저 느낌일 뿐이야, 언론이 너무 호들갑을 떠는 부분도 있고…’
한창 총기사고가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 한국의 지인들에게 염려 말라는 뜻으로 치던 저런 ‘쉴드’를 이젠 더는 못칠 것 같다.
집에서 지내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을 표현한 인터넷 상에서 떠돌던 유행어 ‘이불 밖은 위험해’ 가 사뭇 진지하게 다가오는 시절이다.
지난 1월 중순 이후 부터 눈 뜨면 하루가 멀다하고 접하게 되는 뉴욕시의 사건사고, 특히 아시안을 대상으로 한 범죄 관련 뉴스를 볼 때 마다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 처럼 커다란 검은 뭉게 구름 같은 것이 우리 동네를 향해, 나를 향해 조금있으면 네 차례라며 기분 나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한걸음 한걸음 느린 듯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열흘 전, 내가 다니는 집 근처 한인타운 팰리세이즈팍 성 마이클 성당에서는 얼마전 차이나타운의 아파트에서 흑인 노숙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한국계 여성 크리스티나 리씨의 장례식이 있었다.
언론에 알리지 않은 채 치뤄졌던 그녀의 장례식을 기자도 뒤늦게 알게돼 성당 수녀님과 이 성당의 독실한 신자이기도 한 K모 시의원에게 연락해 본 결과, 이 동네가 아닌 뉴저지 다른 타운에 거주하는 그녀의 부모와 가족들이 조용히 장례를 치르길 원했고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주임신부님을 제외하고 성당 관계자들도 이날 치뤄지는 장례가 그녀의 마지막 길이라는 것을 미사 시작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단다.
뉴욕 뿐 만 아니라 미 전역, 아니 고국에 까지도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이 사건의 피해자의 장례식이 내 집 근처, 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겪은 이 엄청난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슬픈 일이 눈 앞에서 벌어졌는데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과 하느님께선 왜 그녀를 보호해 주시지 않았을까, 과연 이것이 그분께서 일하는 방식이란 말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안 신경성 위염이 재발했다.
코비드 19 팬데믹 동안 아시안에 대한 공격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지난 1월 중순에는 중국계 미국인 여성 미쉘 고씨가 타임스스퀘어 지하철역에서 조현병을 앓던 노숙자에 의해 선로 위로 떠밀려 목숨을 잃고 2월 9일에는 주 유엔 한국대표부 소속 외교관이 맨하탄 한인타운 인근에서 한 남성의 묻지마 폭행을 당하고 이후 나흘이 지나 차이나타운 의 아파트에서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티나 리씨가 노숙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 당한 최근의 사건들을 나열하고 보니 위액이 역류하는 것 같다.
18일, 뉴욕시 정부가 전철에서 노숙자를 몰아내 안전을 강화하고자 하는 ‘전철 안전계획’ 시행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계획의 실행을 앞둔 주말 동안 뉴욕전철에서 손도끼 위협 및 칼부림 사건 등 최소 7건의 강력범죄가 신고돼 시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해 뉴욕 지하철에서의 폭행 중범죄는 코비드19 사태 직전인 2019년보다 25% 증가했고, 선로 위로 다른 사람을 미는 사건은 같은 기간 20건에서 30건으로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뉴욕경찰에 따르면 뉴욕시에서 아시아계를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는 2020년 28건에서 지난해 131건 급증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범죄 체감 온도는 몇 백 퍼센트는 증가한 것 같다. 어쩌다 뉴욕이 이리 됐을까. 맨하탄에 나가면 큰 일 날것 만 같은 기분이다. 나도 페퍼 스프레이를 가방에 넣어두어야 하는걸까.
크리스티나 리 씨 피살 이후 브랑스의 경찰장비 가게에선 페퍼스프레이가 가장 잘 팔리는 아이템이 됐단다. 솔직히 기자도 요즘 다음 달의 맨하탄 외출을 앞두고 아마존에서 페퍼스프레이와 호루라기를 샤핑하는 중이다. 다음달 중순경 맨하탄에서 열리는 영화 관련 오프닝 행사에 부부 동반 초대를 받았는데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아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 맨하탄에 그 행사 우리 안가면 안돼요? 너무 무서워.”
“오빠가 같이 가는데 뭐가 무서워? 그리고 그런일은 숟하게 일어났고 800만명 중 한명 생길까 말까한 일인데.. 여기서 30년 살아온 사람들 한테 그런 말 해봐. 뭐라고 하는지. 그리도 겁나면 넌 안가도 돼. 나 혼자 다녀올께”
혼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버스도 지하철도 타야 하는데 60대 아시안 남성이 지하철에서 공격을 받았다는 뉴스의 주인공이 내 남편이 되면 어쩌나-잠시 내가 미국생활 겁쟁이가 된 것 같고 챙피한 기분도 들고 더 이상 이야기가 안되겠다 싶어 맨하탄 가지 말자는 말은 더 이상 안하고 있지만 마음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에릭 아담스 뉴욕시장에게도 상당히 유감이다.
경찰 출신인 그는 지난 해 선거운동 때 부터 경찰예산 삭감은 없다고 공언했지만 얼마전 발표한 새 회계연도 뉴욕시 예산에서 뉴욕경찰에는 54억 달러가 배정 돼 현 회계연도 56억 달러 대비 2억 달러가 줄었다.
그는 NYPD 예산 관련 질문에 돈을 더 쓰는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써야 한다”고 말했다. 대체 이것이 말인가 막걸리인가. 뉴욕에서 최근 연이은 폭력, 살인사건 이 발생함에도 뉴욕경찰 예산확대에 선을 긋는 아담스 시장은 BLM 지지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란 말인가.
BLM 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아시아계 커뮤니티는 흑인 목숨과 함께 아시안 목숨도 소중하다며 함께 부르짖으며 연대했다. 하지만 지금 흑인 커뮤니티는 연일 이어진 아시안 증오범죄에 얼마나 연대를 하고 있는지.
아니 연대까지는 아니라도 아시안들을 제발 그만 찌르고 그만 밀고 그만 때렸으면 좋겠다.
BLM 이후 아시안 커뮤니티와 흑인 커뮤니티 사이의 연대가 더 이상 진전 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경찰력 증강 부분에서의 견해 차이라고 뉴욕 타임즈가 보도 한 바 있다.
2년만에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 건물에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현수막이 다시 걸렸다는 뉴스에 지금 같아서는 허탈감 마저 느껴진다. Enough is enough.
얼마전 뉴욕 포스트는 맨하탄에 거주하는 아시안 여성 10명 중 9명은 거리를 다닐 때, 지하철을 탈때 불안감을 느낀다는 응답을 했다고 보도했다. 언론이 보도한 부분들에 대한 아담스 시장의 공감지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
아담스 시장은 15일, 차이나타운에서 무참히 살해 당한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티나 리 씨의 추모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은 채 시장실 관계자만 보내 “끔찍한 사건이다. 아시안 커뮤니티와 함께하고 있다 “는 짧은 메세지만 전달했다. 숨진 이씨가 사는 지역구를 대표하는 유린 니우 뉴욕주 하원의원은 “아담스 시장은 이번 사건에 대한 잔인성과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아시안 커뮤니티가 표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는 데 실패했다”며 시장을 비난하기도 했다.
에릭아담스, 그가 흑인들만의 시장이 되지 않길 바란다. 지구상의 모든 인종, 민족이 다 모여살고 있는 뉴욕이라는 멜팅 팟을 저을 능력이 안된다면 지금이라도 내려오는게 답일듯 싶다.
뉴욕 안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