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3년차에 접어든다. 돌아보면 그 엄혹한 세월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나와 우리 모두가 대견하기만 하다. 서울은 전면 봉쇄까지 가진 않았지만 2년전 이 시기, 이곳은 거의 전면 봉쇄의 수준인 락다운이 실시 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직은 완전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이제 미국은 마스크도 벗고 일상으로 회복하는 중이다. 요즘 감염 숫자로만 보면 서울이 심각한 듯 한데 치명률은 낮은 수준이라 하니 다들 내려놓은 듯 싶다. 다음 글은 2년 전 바로 이 시기, 기자가 서울에 나가 있으면서 겪었던 서울의 코로나 19 상황에 관한 글이다. 책꽂이에 꽂혀있던 재외동포저널 2020년 봄호를 들춰 보다가 이 글이 눈에 띄었다. 모두가 함께 겪었던 코로나 시절을 되돌아 본다는 의미에서 하이유에스 코리아 독자들과 공유해본다.
“성모님, 우리 일상으로 돌아가도 되나요?”
서울소재 미 대사관에서의 일 때문에 한국에 들어 온지 석 달 하고도 열흘이 넘었다. 계절의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코로나19’라는 낯선 이름이 겨울과 봄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소리 없이 때 맞춰 자신의 옷을 갈아입으며 우리를 봄의 끝자락으로 데려다 놓았다.
요 며칠 우리의 옷차림도 가벼워졌다. 옷의 색깔도 시원하고 고와졌다. 옷과 그 색만 보면 모든 것이 마치 제 자리를 찾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그런데 외출을 위해 나름 멋을 낸 후 마스크와 손 소독제를 핸드백에 챙겨 넣을 땐 아직도 가슴 한켠이 먹먹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막 하나를 두고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무서운 이웃과 더 오랜 동거를 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부담감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는 지난 3개월 여 나와 동거를 하면서 나에게 꽤 많은 것을 던져 주었다. 성찰(省察)이라는 거창한 말까지 쓰기는 그렇지만 무엇보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주고 있는 것이 그 첫 번째. 그리고 다른 여러 개가 있지만 더 길어진다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코로나19가 바꾸어 놓은 일상
한국으로 출국을 준비 하던 올해 1월 중순, 미국 친구 한 명이 ‘우한폐렴이 중국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데 너 나가도 괜찮겠냐’ 며 걱정을 했다. 그때만 해도 ‘우한폐렴? 조류독감 같은 그런거 겠지’ 하며 그닥 신경 쓰지 않았었다.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마스크를 착용한 상당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때에도 나는 그저 한국의 미세먼지 때문에 착용한 마스크 일거라고 생각했고 준비성이 참 좋은 사람들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계속 접하게 되는 뉴스를 보며 사태의 심각성이 슬며시 내게도 다가왔고 유달리 폐가 약한 친정 오빠를 위해 올케가 마스크와 손 소독제 및 알콜 솜 등을 구비하며 조카들에게 각별한 위생교육을 시키는 것을 보면서 유난하다 싶었지만 그때부터 나는 코로나의 볼모가 되어야 했다. 공식명칭 또한 우한폐렴이 아닌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것도 그 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그 시기, 중국 관광객들을 막네 마네 온 오프라인에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오갔고 정치권에서는 그 점을 쟁점화하며 야당은 정부를 맹공했고 확진자는 증가했다. 2월 중순 부터는 최후이자 최선의 개인 방어 무기라는 마스크의 구입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확진자 사망자 수가 치솟아 올랐고 마스크를 사재기하거나 중국으로 반출하는 일이 속속 적발됐다. 그러자 마스크는 동나, 품귀를 넘어 대란을 빚었다. 3월 초, 대사관 일이 늦어지고 있어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즈음 이게 왠일인가. 미국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독감 감기에 불과하다며 그간 큰 소리 뻥뻥 치던 트럼프의 체면도 한순간에 무너졌다. 게다가 미 동부, 나의 생활권역인 뉴욕, 뉴저지가 먼저 코로나19에 완전히 뚫려 버린 것이다. 이즈음 세계 각국은 대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고 각자의 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문을 걸어 잠궜다.
서울의 미 대사관도 문을 닫았고 미국으로 가려해도 갈 수 없었다. 뉴저지 내가 살던 동네도 모든 비즈니스가 멈추었고 사람들은 식료품이나 약국에 가는 것 외엔 집밖으로 나와선 안 되었다. 그나마 허용되는 외출이 아침 5시부터 밤 8시까지 만이었다.
뉴욕 동포 라디오에서 방송을 하는 옆지기를 통해, 그리고 뉴욕 한인 셀럽들의 유튜브를 통해 언론에는 노출되지 않았던 그곳의 일상 B컷들을 접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참담’하다라고 밖에… 옛 어른들의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는 표현이 딱 이었다.
역병 때문에 발이 묶여 가족도 못 만나고 이게 무슨 변고인가 하며 점점 우울해졌다.
같은 시기 한국도 일상의 대부분이 멈춘 것은 마찬가지였다. 조금 나아지는 듯싶다가 ‘신천지’ 라는 복병이 튀어나오면서 나라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신천지 외에도 종교활동을 통한(특히 개신교) 감염이 확산되면서 천주교, 불교, 개신교에선 각각의 종교 활동이 잠정 중단됐다.
천주교 신자인 나에게 미사 중단이란 이 엄혹한 시기에 적잖은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외출, 여행 대신 스스로 ‘자가격리’를 선택했다. 나 또한 다행스레 마련된 서울의 모처에 지내면서 자가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 스스로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난 집에 머무는 것을 매우 사랑하는(?)스타일이기는 하다. 그래도 타향이 돼 버린 서울에서 혼자 자가격리를 어떻게 견디나 싶었는데 지내다 보니 어색하지 않았고 이 또한 일종의 정신승리 일수는 있겠지만 내 취미가 자가격리이고 특기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것을 이번에 새로 발견했던 것이다.
‘코로나19’ 새 발견- 라디오, 클래식 그리고 고물상과 책
내가 생각해도 참 대견하게 혼자만의 생활을 잘 견뎌냈고 또 그러고 있다. 재외동포저널 편집회의 이외에는 외출은 없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집에 혼자 있다 보니 빈 공간을 사람 소리로 나마 채워보고자 하는 마음에 자연스레 TV를 켜놓았었다. 눈 뜨면 자연스레 리모콘에 손이 갔다. 그런데 뉴스는 온통 코로나 바이러스 소식이고 그 외에 각 채널 마다 이어지는 TV 예능들을 보노라니 공허하기 그지없었고 우울해 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즈음 옆집 옥탑에 살고 있는 고양이가 내 루프 탑 하우스 밖으로 연결된 인터넷 선을 갉아 먹는 바람에 이틀을 인터넷 프리 상태로 지내야 했다. TV는 고사하고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으니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참으로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해는 지는데 음악조차 들을 수 없고 그렇다고 마땅히 읽을 책도 없었다. 이틀 밤을 보낼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라디오! 집 근처 전자상가로 달려가 조그마한 파나소닉 손 라디오를 사왔다. 틀어보니 아주 짱짱했다.
2편에 계속
뉴욕 안지영 기자